캠벨의 아스날 이적, ‘진짜’ 이야기 1부: 토트넘 캠벨의 고민 [디 애슬레틱]
Premier League/아스날

캠벨의 아스날 이적, ‘진짜’ 이야기 1부: 토트넘 캠벨의 고민 [디 애슬레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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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28일 기존 블로그에 포스팅했던 글을 겨온 것입니다.

토트넘 성골에서 아스날의 배신자로: 솔 캠벨

2001년 4월 8일 일요일이었다(역주-캠벨 토트넘 시절). FA컵 4강 경기가 시작하기 1시간 남짓 남은 시점, 아스날의 선수들은 올드 트래포드 경기장에서 워밍업을 하고 있었다. 동시에 토트넘 핫스퍼 선수단이 터널 입구에서 달려나오자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박수갈채와 함께 우려의 소리도 들려왔다. 두 달 간 전열에서 이탈했던 스티븐 카가 수염을 깎은 채로 돌아온 광경은 미리 장내에 들어와 있었던 스퍼스 서포터들에게 큰 기쁨을 선사했다. 세르게이 레브로프와 팀 셔우드가 있다는 것도 정말 좋았다. 그러나 그들의 상징과도 같은 사나이는 없었다. 토트넘 팬들이 원했던, 그 선수는 보이지 않았다.

 

솔 캠벨은 혼자 조깅을 하며 느지막이 터널을 빠져나왔다. 그는 한 해 전 가을 잉글랜드 대표팀의 월드컵 예선 알바니아 전에서 부상을 당한 뒤 오른쪽 발목에 지속적으로 주사제를 맞고 있었고, 발목에는 양말 안쪽에 붕대를 칭칭 감아 놓았다. 다만 그가 동료들에게 뛰어가면서 불편한 기색을 보이진 않았다. 캠벨이 나타나자, 관중들의 분위기는 180도 달라졌다.

 

“그는 그 전 경기에 나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를 보고 ‘솔(캠벨)이 뛰는 건가?’라고 생각했죠.” 당시 토트넘의 중앙 미드필더였던 스티븐 클레멘스가 말했다. 캠벨은 정말 거대했어요. 수비 라인에 껴 있는 돌덩이였죠. 그는 정말 열정적이고 빨랐어요. 득점 찬스를 마지막에 저지하는 중요한 태클도 굉장히 많이 해냈죠. 캠벨은 동료의 실수를 가려줄 수 있었고, 미드필더로서 뒤에 그를 두고 뛴다는 건 뭔가 다른 자신감을 갖도록 해줬습니다. 그 날 오후 캠벨은 경기 시작을 얼마 남기지 않고 출전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어요. 그가 경기장에 나타나자 우리 팬들이 했던 응원을 기억합니다. 다른 선수들이 보였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함성이었죠.”

 

“모두가 그의 경기를 볼 수 있다는 데에 정말 기뻐했어요. 솔은 그 정도로 우리에게 큰 존재였습니다.”

 

토트넘의 한 해 농사는 그 경기에 달려있었다. 당시 프리미어리그에서 중위권을 떠돌던 토트넘은 오랜 협상 이후 사우스햄튼의 제의를 거절한 새 감독 글렌 호들을 선임했고, 아스날 전은 그가 감독하는 첫 경기였다. 호들은 계약 기간을 단 3개월만 남겨두고 있던 캠벨과 대런 앤더튼의 미래를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을 그대로 물려받았지만, 그의 바람은 트로피를 따내 여름 리빌딩을 약속하면서 두 잉글랜드 국가대표 선수를 지키는 것이었다. 캠벨은 그의 핏이 완전하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여전히 경기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캠벨은 주장 완장을 찼고, 일단 동점 상황만 진행되면 이 도박은 결실을 맺을 것으로 보였다. 적어도 한동안은 말이다.

 

아르센 벵거의 지휘 하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아스날은 공격을 퍼부었지만 번번이 캠벨에게 막히고 말았다. 실바인 윌토르, 실비뉴, 로베르 피레스가 캠벨의 수비 앞에 좌절했다. 흥분이 극에 치닫던 상황에서, 개리 도허티의 헤더가 데이비드 시먼을 뚫었고, 토트넘은 리드를 가져갔다. 그러나 그 기쁨의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30분이 조금 넘은 시점, 레이 팔러가 측면에서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으며 질주하자 캠벨이 몸으로 들이 박으며 그를 저지했다. 두 선수가 뒤엉키면서 팔러는 캠벨의 오른쪽 발목 위에 주저 앉아버렸다. 그의 발목은 완전히 돌아가 버렸다.

 

 

즉시 옐로우 카드를 받은 캠벨은 피레스의 택배 프리킥을 크리스 페리의 위로 올라타 받아낸 패트릭 비에이라가 동점골을 터트릴 때에도 사이드라인에서 고통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후 다시 뛰려고 했던 캠벨은 거의 바로 교체됐다. 레들리 킹이 그 대신 투입됐고 – 되돌아보면, 이 교체는 토트넘의 주장과 상징이 바뀌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심리적으로도 큰 충격을 받은 캠벨은 절뚝거리며 경기장을 떠났다. “부상이 나오자마자, 경기장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바뀌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클레멘스는 말했다. “솔은 서포터와 선수 모두에게 정말 대단한 존재였던 겁니다.”

 

그의 시즌은 끝났다. 토트넘은 후반전 피레스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며 무너졌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캠벨의 토트넘 클럽 커리어 역시 그 경기가 끝이었다는 것이다. 그 부상은 캠벨이 전열에서 완전히 이탈하도록 했다. 클럽의 모든 임원들이 그와 재계약을 체결하길 바란다고 말했고, 캠벨 역시 강력한 잔류 의사를 드러냈지만, 그는 다시는 토트넘의 유니폼을 입지 않았다.

 

그 해 여름, 20m 파운드의 가치가 있으며 리그 최고의 수비수라고 평가받던, 유스 기초 레벨부터 차례차례 승급해 부동의 주전까지 올라선, 팀을 몇 번이나 캐리하고 웸블리 컵 결승에서 팀을 승리를 이끈 주장, 솔 캠벨은 한 푼의 이적료도 남기지 않고 팀을 걸어나갔다. 토트넘은 그를 팔아 리빌딩을 위한 자금을 마련해 다시 선수단을 강화하고 충격을 줄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적료 없이 계약이 끝난 캠벨을 잃고 말았다.

 

최악의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팬들이 FA 컵 4강에서 그의 복귀를 직접 보고 기뻐했던 게 7개월 전이었다. 캠벨을 대하는 그들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지난 화요일은 그가 아스날의 23번 셔츠를 입고 엄청난 비난의 함성을 들으며 화이트 하트 레인에 발을 내딛은지 딱 19년이 된 날이었다. 4,000명의 토트넘 팬들은 ‘유다’라는 문구가 쓰여진 배너를 들고 캠벨의 배신을 비난했다. 한 팬은 “유다가 빵조각을 받아들자, 사탄이 그에게 깃드니…”로 시작하는 ‘요한복음 13장 27절’을 읊었다.

 

그들의 반감은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았다.

 

 

깨져버린 약속부터 조용한 북런던 교외에서 한밤중에 새로운 구단주를 찾아가고, 산 시로에서의 투어와 바르셀로나의 제의를 거부했던 이야기까지,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가장 충격적이었던 이적 중 하나에 대해 알아보자.


캠벨의 토트넘 생활 중 마지막 몇 년 동안 그 자신이나 클럽 관계자들이 한 공식적인 발언의 횟수와 협상을 둘러싼 일들의 흐름을 보면, 그들의 대화는 지지부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토트넘은 계약이 끝나갈 때 여러 선택지를 생각하면서 표면적으로는 우승에 도전한다는 그의 장기적인 야망을 공유할 수 있는 팀으로 자신의 성장과 함께 유스 랭킹이 오른 토트넘에 남는 체했던 선수를 쉽게 눌러앉히려 했다. 또한 스포츠와 미디어 기업 ENIC이 앨런 슈거의 구단 지분 27%를 구매하면서 보드진의 변화가 일어나고, 이러한 자세는 절대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구단주가 바뀌는 시점이 선수가 새로운 회장은 어떨지 판단해야 하도록 하면서 궁극적으로 문제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슈가와 그의 후임인 다니엘 레비 회장과 경영 부회장 데이비드 버처까지 모두가 그들의 주장이 화이트 하트 레인에 남길 바랐다. 캠벨은 떠나간 회장의 재산을 불려줬다. 새로 들어온 투자자들에게 그를 지키는 건 새로운 오너십의 첫인상을 남길 기회였다.

 

“우리가 솔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기를 바라지 않는 팬은 없다고 생각해요.” 2001년 2월 ENIC이 지분을 29.9%까지 높였을 때 버처가 한 말이다. “문제는 내 결정으로만 해결되는 일이 아니라는 거죠.”

 

버처는 캠벨과의 대화가 슈가 시절 말년에 지속됐던 상태로 몇 달 간 이어지자 좌절했다. 로마가 막 리그컵을 들어올린 캠벨에게 접근했다가 물러났던 1999년 가을 협상 중지 이후, 양측의 협상은 다음에 다시 만날 날짜를 정하는 일기가 되어버렸다. 이는 토트넘 기자회견의 단골 주제가 됐다.

 

“솔 캠벨은 시즌 종료 전까지는 계약 협상에 임하지 않으며 축구에 집중하고 싶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습니다.” 당시 풋볼 디렉터였던 데이비드 플리트는 말했다. “우리도 이해해요.” 그는 이듬해에도 이런 말을 반복해야 했다.

 

“꽤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토트넘에 남길 바랐고, 우리는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그는 일단 기본적으로 클럽이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보려 했어요.” 당시 캠벨의 에이전트였던 스카이 앤드류는 본지와의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승자였죠. 근데 그는 승자들의 팀에 있길 원했어요. ‘토트넘에 남으면서 우승을 할 수 있을까? 클럽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는 걸까?’ 이게 캠벨이 항상 생각했던 논제예요.”

 

“앨런 슈가 시절 토트넘과 가장 잦은 대화를 나눴던 게 접니다. 돌아보면, 그는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었어요. 정말 올곧은 사람이었거든요. 막 말을 바꾸고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캠벨과 슈가의 사이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관계였다.

 

회장에 대한 선수의 믿음은 1998년 10월 프라이드 파크에서의 더비 카운티 전 승리 이후 캠벨에게 제기된 폭행 혐의를 다루는 클럽의 태도 때문에 흔들렸다. 토트넘의 센터백이 자신은 난투극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하자 양팀 선수들이 충돌했다. 경비원 렉스 먼디는 엄지 손가락 염좌와 손 골절 부상을 당했다. 계속해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 캠벨은 두 달 뒤 상해죄로 기소됐다.

 

캠벨은 1992년 데뷔전에서 첼시를 상대로 득점했다.

 

클럽의 자체 변호사는 그가 유죄판결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죄를 인정하면서 사건을 빠르게 종결시키는 것을 고려할 수 있다는 제안을 했지만, 캠벨은 이를 거절했다. 선수의 말에 따르면, 그는 당시 구단 비서를 통해 그가 법적으로 합의를 해야 한다는 것을 서면으로 전달받았다고 한다. 영국 검찰청에 따르면 이 사건은 1999년 여름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수사 종결 처리되었지만, 캠벨은 회장 그룹의 신뢰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실망했다. 경기에 대한 평판이 나빠지게 했다는 FA의 비난은 다음 시즌까지 지속됐다.

 

캠벨의 공식 자서전을 보면, 그가 여전히 폭행죄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던 때에 슈가가 데일리메일을 상대로 제기한 명예 훼손 사건에서 증인으로 출석할 것을 요청하면서 캠벨과 토트넘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는 듯한 내용이 암시된다. 그는 “나는 이후 또다른 사건으로 법정에 출두해야 했다”라고 말했다. 다만 토트넘을 향한 슈가의 재정적 지원에 의문을 표하는 내용을 담아 고소를 당한 데일리 메일의 기사는 폭행죄 사건이 종결되고 다섯 달이 지난 1999년 12월까지도 출간되지 않았다.

 

논쟁의 여지가 단 한 줌도 없는 사실은 캠벨이 회장을 변호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유스부터 차근차근 올라온 성골 주장이 그가 받는 13,500 파운드의 주급이 얼마나 급여 체계에서 동떨어진 금액인지 알고도 별로 놀라워하지 않았다는 폭로성 기사가 보도되는 결과를 낳았다.

 

사실, 슈가, 플리트, 조지 그레이엄 감독은 겉으로 보기엔 긍정적인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언제나 캠벨이 그의 계약 만료가 가까워지기 전까지는 재계약이나 팀을 떠나는 것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그가 유리한 편에 서려고 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나타냈다. 슈가와 클럽의 대리인들은 에섹스 주 브렌트우드의 회장 사무실에 모여 재계약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한 선수에 대한 미래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미팅을 가지기도 했다. 슈가는 그의 변함없는 태도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토트넘의 가장 소중한 자산 캠벨이 계약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 공짜로 떠나기 위해 꾀를 내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은 커져갔다.

 

당시 잉글랜드 축구는 보스만 룰이 주는 영향을 이해해가고 있었다. 스티브 맥마나만은 1999년 1월 리버풀을 기소하고 레알 마드리드에 자유계약으로 이적해 새로운 이적 규정을 활용하는 첫 엘리트 선수가 될 수도 있었지만, 구단들은 여전히 계약 만료일을 많이 앞둔 시점에 미리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데에 익숙하지 않았다. 재계약 제의를 전보다 일찍 하거나 유망한 어린 선수에게 큰 돈을 약속하는 것은 내부 정책의 변화를 요했다. 토트넘 역시 다르지 않았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즈 유나이티드는 2000년 여름 캠벨의 이적료로 18m 파운드를 제의했다. 만약 그때 토트넘이 선수가 남을 생각이 1도 없다는 걸 확실히 알았다면 매각을 고려했을 것이다. 그 정도 금액은 클럽의 가치 평가보다 크게 못 미치긴 해도, 두 세 명의 준수한 대체자들을 사와 월드클래스 선수 하나를 팔고 팀을 전체적으로 리빌딩하며 발전시킬 기회에 보태는 정도는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면서 그의 비협조적인 태도는 바뀔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캠벨의 시장 가치는 계속해서 떨어져 갔다. 돌이켜보면, 토트넘은 그에게 끌려다니고 있었다.

 

“데이비드 플리트와 조지 그래이엄은 정말 옛날 축구에 익숙했던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은 보스만 룰이 중요하다는 걸 알지 못했죠.” 슈가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나는 그들에게 ‘이 솔 캠벨이라는 친구는, 그의 에이전트인 스카이 앤드류와 함께 일하고 있어요… 그는 토트넘에 남지 않을 겁니다. 계약 기간 끝까지 기다렸다가 팀을 떠날 거라고요. 아시겠어요?’라고 말하자, 그들은 내게 ‘아니에요 ㅋㅋㅋ 회장님. 그냥 놔두세요. 우릴 믿으시면 캠벨은 남을 겁니다.’라고 했죠.”

 

“나는 당신들이 보스만 룰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라고 했어요. 우리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오퍼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내게 전화를 걸어 솔 캠벨에게 18m 파운드를 배팅했고, 나는 그들에게 180m 파운드를 가져오라고 했어요 (뭐 별다른 의미를 가진 말은 아니죠). 문제는 선수가 기다렸다 자유계약으로 걸어나가는 걸 노리고 있기 때문에 이적도 안될 거라는 겁니다. 그래서 난 맨유의 마틴 에드워즈에게 1800만 파운드가 아니라 80펜스를 줘도 될 거라고 했어요. 그는 절대로 떠나지 않았을 겁니다.”

 

캠벨이 자유 계약을 통해 해외로 뜨기만 했더라도 그의 의사는 어느 정도의 지지를 받았을 것이다. 토트넘의 이사진은 그에 대한 통제력을 다시는 되찾지 못하리라는 걸 깨닫고 몇 페니도 받지 못할 위기에 처해 분통을 터트렸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그를 팔 수 있지 않았냐고 말하죠. 그러나 그의 계획을 알아차렸을 땐, 그의 허락 없이는 그를 팔 수 없는 지경이 돼버렸어요.” 그제서야 회장의 생각에 동의하게 된 그레이엄 감독은 말했다. “우리가 그에 대한 이적을 받아들이더라도, 솔이 가지 않을 겁니다. 팬들이 이걸 이해하는 게 중요해요.”

 

“그는 팀에 남지도, 대화를 하지도 않을 겁니다. 우리의 제안을 신경도 쓰지 않을 거예요. 우리도 그에게 잉글랜드 축구계에서 가장 좋은 급의 계약을 제안하고 싶죠. 근데 할 수 있는 게 없네요. 솔의 계획은 계약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거니까요.”

 

앤드류는 “만약 그가 새 계약에 사인하고 그 후에 ‘내년에 떠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면? 솔도 위선자가 되길 원하진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충분한 신뢰를 주지 않아요. 만약 선수가 팀에 남는다면, 그는 박수갈채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선수가 큰 돈을 바라보고 떠난다면, 그들은 비난받습니다.돈 외에 다른 걸 원해서 떠나도 비난받죠.결국 그들이 뭘 하든,비난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 모든 시나리오는 슈가 회장으로 하여금 축구라는 스포츠 자체에 환멸감을 느끼게 했고, ENIC에 지분을 매각한 뒤 영원히 축구에서 손을 떼겠다는 그의 생각을 부채질했다. 그의 캡틴의 태도는 그를 격분하게 만들었다. 뒷일을 생각한 슈가는 감독과 풋볼 디렉터에게 캠벨을 리저브 팀으로 내려버리라는 극단적인 지시를 하려고 했다. 퍼스트팀의 유망주들에게 출전 시간을 줌과 동시에, 잉글랜드 내에서 이 선수의 위상을 떨어뜨려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강경책이 계약에 대한 그의 태도를 억지로 바꿀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의 속셈만 알 수 있었다면 나는 그 정도까지 했을 거예요… 솔을 리저브로 보내버리는 거죠.” 슈가는 덧붙였다. “난 그가 뛰지 못하도록 하고 싶었어요. ‘네가 날 위해 뛰지 않을 거라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요,) 그냥 벤치로 가라. 네가 날 위해 뛰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넌 모든 경기를 뛰진 못할 거야’ 이런 식인 거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때의 나는 내 생각을 관철시킬 수 있을 만한 권한이 없었어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난 곧바로 이 일을 실행할 겁니다.”

 

“우리는 솔 캠벨과 여러 차례 미팅을 가졌고 소위 말하는 ‘중립 구역’이었던 호텔에서 가식적인 대화를 했어요. 그리고 [플리트와 그레이엄은] ‘보세요 회장님. 캠벨은 내일부터 우리와 함께 할 겁니다’라고 말하죠. 물론 그 내일이 되면 언제나 ‘솔은 지금 당장이라도 떠나길 원합니다’라는 소식이 들려오고요. 그냥 그런 것들의 반복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스날이 캠벨에게 주급으로 14만 파운드, 그러니까 연봉으로 따지면 거의 700만 파운드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이적료가 없다면 그 정도는 남는 장사가 됩니다. 진짜 엄청 남는 장사예요. 만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2000년에) 그를 1800만 파운드에 사갔다면, 그들은 거기에 더해서 급여를 또 마련해야 했을 겁니다. 만약 맨유가 캠벨과 4년 계약을 체결해 총 1800만 파운드를 연봉으로 내줬다면, 캠벨에겐 이적료의 두 배가 들어가는 셈이죠. 그래서 아스날은 정말 영리하게 일을 처리한 거예요. 그 시점이 바로 보스만 룰의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아스날이 엄청난 이득을 취한 그 때요.

 

“난 스카이 앤드류와 솔 캠벨이 뭘 하려는지 알 수 있었어요. 일단 캠벨이 미디어와의 인터뷰에서 클럽의 그 어떤 사람도 자신에게 재계약을 제의하지 않았다고 말했죠.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어요. 난 분통을 터트리며 스카이 스포츠 뉴스로 찾아가 그의 말이 명백한 거짓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감독과 풋볼 디렉터와 회의를 하려 했지만 그들은 캠벨이 자신들과 함께 경기를 뛰고 있다고 했고, 불행히도 그들은 이 보스만 룰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어요.”

 

“난 솔을 드레싱룸에서 보고 ‘무슨 거짓말을 한 거야? 왜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해?’라고 했죠. 솔은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진짜로요. 그들이 거짓 기사를 낸 겁니다’라고 했고, 난 다시 ‘아냐. 네가 그렇게 말했잖아’라고 말했죠. 계속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다 알고 있었지만,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언론이 자신의 미래에 대해 질문할 경우, 캠벨은 대체로 클럽에게 충성심을 보이는 인터뷰를 했다. 하지만 그의 위선적인 발언들은 이후 몇 년 동안 배신감을 배가시켰다. 2000년 12월 캠벨은 “아스날과 계약한다는 건 생각하기도 어렵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아스날 이적 이후 이 발언이 특히 그의 꽁무니를 따라다녔지만 그는 대부분의 인터뷰에서 비슷한 말을 반복했다. 캠벨은 열린 마음으로 선택지를 찾아보고 있었지만, 계약이 끝나지 않았던 당시에는 토트넘에 충성했다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건 그가 그의 클럽에서 야망을 모두 충족시키는 것이었을 테다. 그는 최소한 계약 기간 내에는 다른 팀으로 이적하지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 모두 틀린 말은 아니다.

 

토트넘이 신년에 7경기에서 6클린시트를 기록하며 쾌조의 성적을 내자 스카이 스포츠의 클레어 톰린슨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금 상황이 어떤가요, 솔? 토트넘에 남을 건가요?”

 

그는 아마 이 질문이 나올 걸 알고 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캠벨은 볼을 잠깐 긁고 하늘을 바라보다가, 짧은 답변을 남겼다.

 

“난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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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 staying.

 

사실, 그는 언제나 팀이 발전한다는 단서를 찾으려 했다. 팀의 8년만의 첫 메이저 대회 우승이었던 1999년 리그컵 우승은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의 첫걸음이었지만, 그게 그레이엄 감독 시절의 정점이었다. 토트넘은 레브로프를 11m 파운드에 영입하며 클럽 레코드를 갈아치웠지만, 두 시즌이 지나도 그들은 여전히 중위권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은 캠벨이 퍼스트팀에 있던 8년 간 단 한 번도 7위보다 높은 순위에 오른 적이 없었다.

 

캠벨은 플리트의 사무실에서 그와 회동을 가져 새로운 영입에 대한 정보를 달라며 발전의 단서-역주: 자꾸 발전의 단서, 발전의 증거 같은 식으로 나오는 워딩은 evidence of progress로, 캠벨이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요소로 보인다-를 얻으려 했다. 풋볼 디렉터는 최선을 다해 그를 달래며 이적시장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했지만, 그는 캠벨이 팀의 경쟁 불능 상태에 점차 환멸감을 느껴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캠벨은 자신이 토트넘에 너무 오래 남게 될까봐 걱정하는 것이 분명했다.

 

슈가가 명예훼손 소송에서 승소하면서 그의 주식 매각은 성공했고, 이제 팀이 바뀌어 가는 걸 보여줘야 하는 사람들은 버처와 레비, 그리고 ENIC이 되었다. 나중에 캠벨은 ‘구단주가 바뀌고 한 시즌이 지났을 때 그들이 장기적으로 팀을 이끌려하고 퀄리티 있는 선수들을 사왔다면’ 4년 재계약을 할 마음이 있었다고 했지만, 토트넘 팬들은 그러고 나면 그와 어떤 계약을 체결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만이 남을 거라고 주장할 것이다. 아니면, ‘레비라면’ 구두쇠처럼 딱 1년씩만 재계약을 하자고 제안했을 거라고 할지도 모른다-역주: 실제로 1년 계약 제시한 건 아닙니다.-레비와 캠벨은 런던 중부의 로얄 런캐스터 호텔에서 만나 미팅을 가졌지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런던 메이페어에 위치한 버처-필립스의 사무실에서 열린 이어진 회담에는 에이전트 앤드류까지 참여했다. 새로이 부회장으로 부임해 익숙지 않은 롤에 적응해 가던 레비는 보다 긴장된 채로 회의에 임해 캠벨에게 새 계약을 체결하면 주급을 6만 파운드까지 올릴 수 있을 거라고 알려줬다. 서면으로 제안을 한 뒤 후속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등의 막연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 날 미팅에도 참여했던 플리트는 토트넘이 선수를 잃을 것이라는 걸 확신하게 됐다. 다른 이들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레비는 캠벨의 전 동료이자 1998년 은퇴하기 전까지 11년 간 토트넘의 주장을 역임했던 개리 매버트에게 그의 후임이 팀에 좀만 더 남도록 설득해달라고 했다. 그들은 북런던 교외 하들리 우드의 웨스트 로지 파크 호텔에서 만나 커피를 마시며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지만, 매버트 역시 미래를 토트넘이 아닌 다른 팀에서 찾으려 했던 캠벨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캠벨의 동료들 역시 그가 어디로 갈진 전혀 몰랐지만, 토트넘에서 그의 시간이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은 넌지시 알고 있었다.

 

“선수들 사이에는 어떤 특정한 시점 – 아마 크리스마스쯤이었던 거 같네요 – 이 지나면서 사람들도 그가 떠날 거라는 걸 알게 됐기에, 그에게 작별인사를 건네는 것 같다는 농담이 떠돌기도 했어요.” 아래 사진에서 캠벨과 함께 서있는 클레멘스가 말했다. “그는 보스만(FA, 자유계약)이었고 잉글랜드 대표팀의 센터백이었어요. 아마 당시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수비수였을 겁니다. 우리 모두 그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죠.”

 

캠벨과 클레멘스는 토트넘 유스의 자랑이었다.

 

호들 선임이 캠벨의 잔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여줄지 모른다는 희망도 있었다. 호들은 캠벨의 A 매치 22경기를 감독했고, 1998년 여름에는 대표팀 주장 완장을 주기도 했다. 아스날에게 올드 트래포드에서 FA 컵 4강 탈락의 쓴맛을 맛보고 15일 뒤, 캠벨이 재활에 열중하고 있을 때 호들은 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가족과 저녁 식사를 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의 이야기도 다른 때와 다름없었다. 호들은 그의 토트넘 생활을 연장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지만, 캠벨이 에이전트에게 굉장히 큰 영향을 받고 있다는 느낌만 받으며 식사를 마쳐야 했다.

 

캠벨은 다른 주장을 펼쳤다. 그는 클럽의 야망을 확인하기는커녕 어림도 없었다고 하면서, 호들의 태도는 ‘마치 굉장히 성가신 일을 처리하는 것 같았다’라고 주장했다. 저녁 식사는 어색한 분위기로 흘러가다 마무리됐다고 한다. 마치 양측 모두가 드디어 시간이 다 됐다는 걸 안심하는 듯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캠벨의 포르쉐는 시동이 걸리지 않았고 그는 정비업체가 그를 도와주러 오길 기다리는 동안 호들의 집으로 돌아가 있어야 했다.

 

그 당시, 유럽 전역의 클럽들이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레알 마드리드, 바이에른 뮌헨, 인터 밀란, 바르셀로나가 캠벨과 접촉했다. 바이언은 2월에 그에게 빠른 답변을 요구하기도 했다. “우리는 전세계의 모든 메가클럽들에게 관심을 받았어요.” 앤드류는 말했다. “그러나 우리의 스탠스는 토트넘과의 상황을 완전히 정리하기 전까진 그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겠다는 거였죠. 그러자 바이언은 ‘알았어. 지금 우리와 대화하지 않을 거라면, 그냥 손 뗄게’라고 했고, 레알 마드리드도 마찬가지였죠. 그러나 몇몇 팀들은 포기하지 않았어요. 특히 인테르와 바르셀로나가 그랬죠. 그들은 캠벨과 대화하기 위해 꾸준히 기다렸어요.”

 

“그런 상황에서도, 솔은 일단 클럽에 남아 경기를 뛰겠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건 4, 5월이었어요.”

 

5월 말 토트넘의 훈련장이었던 치그웰에서 열린 구단과의 마지막 미팅에는 레비, 플리트, 호들, 캠벨, 앤드류가 모두 참여했다. 테이블에는 매우 구체적인 재계약 제의가 올라왔다. “그들은 여러 숫자들을 말하고 있었어요.” 캠벨은 회상했다. “‘우리가 이 대회를 우승한다면, 넌 이 정도의 보너스를 받을 거야. 우리가 여기까지 올라간다면, 넌 이걸 받게 될 거야’.난 생각했죠. ‘우리가 어떻게 선수를 하나도 영입하지 않고서 저런 목표를 달성할 수 있지?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그를 클럽 역대 최고주급자로 만들어줬을 재계약은 빠르게 거절됐고, 앤드류는 곧이어 역제의를 했다. 회담은 원만하게 진행됐다. 아마도 어느 정도의 타협책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 몇 시간 만에 캠벨이 토트넘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내용이 아주 구체적으로 유출됐다. “우리는 스카이스포츠에서 우리가 떠난다는 뉴스를 낸 걸 봤어요.” 앤드류는 말했다. “모든 게 바뀐 시점이 그때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전까지, 캠벨은 팀을 떠나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거든요. 그 뉴스가 나오고, 우리는 그 상황을 이해해 보려고 했습니다. 솔은 다른 누군가에게 (구단에도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고, 타 구단과 협상을 한 적도 없었어요. 난 모든 걸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상황이 바뀌었고 그때는 솔이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클럽들과 합법적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때였어요. 결국 그는 마음을 바꿨습니다.”

 

5월 27일 일요일, 토트넘은 캠벨이 ‘프리미어리그에서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선수들 중 하나로 만들어주겠다는 우리의 오퍼가 있었음에도 이적을 택했다’라는 성명을 냈다. 그들은 선수가 3년 총액 20만 파운드 규모에 2001-02 시즌이 끝날 때 팀이 챔피언스리그에 진출하지 못하면 자유계약으로 풀어준다는 조항을 포함하는 계약을 원하며, 구단은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앤드류는 그런 요구를 한 적도 없다며 부인했다.

 

캠벨도 성명을 내며 맞대응했다. “내 축구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결정이 될 겁니다.” 그는 적었다. “내 결정은 온전히 축구를 기반으로 한 겁니다. 나 솔 캠벨은 9월에 27살이 되고 최대한 빠르게 유럽 내의 메이저 클럽에서 뛰어야 합니다. 나는 스퍼스를 위해 10년 간 뛰었고 클럽을 향한 내 헌신은 그동안 모두가 보았을 겁니다. 내 결정은 오랜 고민 끝에 나온 것입니다. 그건 클럽이 나의 미래에 대해 여러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카와 앤더튼 같은 몇몇 선수들은 그의 결정을 지지하며 그와 같은 기량을 지닌 선수는 유럽 대항전에서 뛰어야 한다는 데에 동의했다. “그는 탑 클럽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어요.” 카는 말했다. “그가 어디로 가든, 나는 그의 행운을 빌어줄 겁니다.” 캠벨은 토트넘의 드레싱룸에서도 항상 그의 마음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고 가슴속에 담아뒀기에, 그가 어디로 갈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잉글랜드 밖으로 떠날 거라고 추측했다.

 

이어지는 2편 링크!
 

캠벨의 아스날 이적, ‘진짜’ 이야기 2부: 아스날의 등장, 불가능했던 이야기의 실현 [디 애슬레

2020년 11월 28일 기존 블로그에 포스팅했던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1편 먼저 보고 오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캠벨의 아스날 이적, ‘진짜’ 이야기 1부: 토트넘 캠벨의 고민 [디 애슬레틱]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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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링크: Dominic Fifield, Daniel Taylor and Philip Buckingham 2020.11.17

(사진: 디 애슬레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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