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흥민과 마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2002 월드컵 키즈, 슈퍼스타가 되어 만나다 [디 애슬레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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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민과 마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2002 월드컵 키즈, 슈퍼스타가 되어 만나다 [디 애슬레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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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16일 기존 블로그에 포스팅했던 글을 겨온 것입니다.

 

지난달, 월드컵 역사에 남을 센세이션한 골을 넣었던 두 전설이 타계했다.

 

하나는 디에고 마라도나였다. 다른 하나는 2002 월드컵 개막전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그 경기의 유일한 골을 득점해 세네갈 쇼크의 주역으로 기억되는 풀럼, 포츠머스, 웨스트햄의 전 미드필더 파파 부바 디오프였다.

 

그 골이 왜 역사에 남을 만했는가? 화려한 테크닉의 절정에서 비롯된 멋진 골이나 토너먼트 경기에서 나온 결정적인 결승골이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 골이 상징적이었던 이유는, 축구가 언제나 표방해왔던 주제로 가는 중요한 발전의 순간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 그야말로 전 세계인의 스포츠가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스포츠는 축구가 유일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최상위권에서의 축구는 언제나 두 대륙이 지배했다. 월드컵은 창립 90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럽이나 남아메리카 이외 나라의 차지가 된 적이 없었다. 21세기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오직 그 두 대륙과 CONCACAF (중앙아메리카, 북아메리카) 만이 결승전을 주최했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2002년 대회의 개막전이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 되었던 이유다.

 

세네갈은 경기가 시작하기 전까지 희망이 거의 없는 팀으로 여겨졌다. 그들 중 좀만 잘하는 선수가 나오면, 그들은 프랑스로 대표팀을 바꿔버리기 일쑤였다. 세네갈에서 태어났지만 그 날 경기에서는 프랑스 유니폼을 입고 뛴 패트릭 비에이라가 좋은 예시이다.

 

그럼에도, 프랑스는 단단한 수비 조직력과 엘 하지 디오프의 빠른 역습으로 무장한 세네갈에게 압도당했다. 세네갈은 1960년 독립 전까지 그들을 식민 지배했던 프랑스를 상대로 승리를 따냈다. 디오프는 문전에서 개막전 유일한 골을 기록했다.

 

물론 결과만을 놓고 얘기하자는 건 아니다. 그 경기가 열렸던 장소, 서울도 중요하다.

 

2002 월드컵은 아시아에서 처음 치러진 대회이자 두 나라 (한국과 일본) 간의 공동 개최가 열렸던 첫 대회였다. 뭔가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경기들은 유럽과 남아메리카의 TV 시청자들에게 익숙치 않은 시간대에 치러졌고, 관중들은 우리가 익숙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응원 문구를 외쳤다. 경기장은 뭔가 미래에서 온 것 같았다.

 

마치 새로운 세상처럼 느껴졌다. 물론, 단순히 지구 반대편에서 경기가 치러졌을 뿐이었다.

 

그래서, 아마 2002 월드컵은 월드컵이라는 의미에 가장 가까운 대회였을지도 모른다. 유럽과 세계의 챔피언이었던 프랑스는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 언더독들의 이야기가 된 대회였다. 세네갈과, 개최국이었던 대한민국의 이야기 말이다.

 

두 나라는 토너먼트에서도 매우 좋은 성과를 냈다. 세네갈은 8강에 진출하며 아프리카 국가 월드컵 최고 기록 타이를 이뤘고, 한국은 한 단계 더 나아가 4강 신화를 썼다.

 

그때 서로의 반대편에 있었던 두 선수는 각자 나라의 경기를 보고 큰 인상을 받았다.

 

하나는 당시 9살의 나이로 대회가 개최된 나라에 있으면서 월드컵의 열기를 몸소 체험했던 손흥민이었다.

“나는 2002년 월드컵에 대해 좋은 기억들을 정말 많이 갖고 있어요.” 그는 2018년 월드컵을 앞두고 FIFA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TV를 통해 경기들을 봤고 8강 스페인과의 승부차기도 봤던 걸 기억합니다. 모두가 미쳐 있었죠. 우리는 그걸 믿을 수 없었어요. 나는 그 대회에서 최고의 한 순간을 뽑을 수 없습니다… 모든 순간이 정말 환상적이었거든요.”

 

다른 하나는 세네갈의 열 살 짜리 소년이었던 사디오 마네였다.

 

마네 역시 지난 대회 전에 2002 월드컵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내가 월드컵 경기를 처음으로 본 게 2002년이었어요.” 라며 운을 뗀 마네는 말했다. “세네갈이 진출했던 첫 월드컵이었죠. 내가 평생 동안 잊지 못할 엄청난 순간이었어요. 그때 난 10살이었는데, 우리나라가 월드컵에서 활약하는 걸 보고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죠.”

 

18년이 지난 지금, 손흥민과 마네는 안필드에서의 경기를 앞두고 있다.

 

물론 그들은 이전에도 많이 만났었다 – 이제 손흥민은 프리미어리그 5년차고, 마네는 6년차다. 하지만 손흥민이 올 시즌 프리미어리그의 최다 득점자 중 하나로 발돋움한 것을 생각해보면, 서로의 명성이 이렇게나 높아져 있는 상태로 치르는 경기는 아마 처음일 것이다.

 

 

그리고 그래서, 이번 경기보다 수준이 높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축구선수 간의 만남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약간 놀라운 점은 아시아가 세계 인구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손흥민 정도의 레벨까지 올라섰던 아시아 축구선수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아시아 축구 전문가로 유명한 존 듀어든은 몇 년 전 역대 아시아 축구선수 5명을 꼽은 적이 있다. 그가 선정한 5인은 알리 다에이, 박지성, 히데토시 나카타, 파울리노 알칸타라, 그리고 1위 차범근이었다.

 

다만 차범근과 4명의 선수 간에는 꽤나 큰 차이가 있다. 아시아에서 그들의 임팩트와 전 세계 축구에서의 임팩트 말이다. 다에이, 나카타, 알칸타라, 박지성은 유럽 축구 시청자들에게 큰 영향력을 지니지 못한다. 차범근은 그 힘을 갖고 있다.

 

그래서, 다에이는 아시아 축구의 전설이자 이란에서 109골을 넣은 국가대표 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골을 득점한 선수다. 그러나, 엘리트 레벨에서 그의 임팩트는 미미했다. 분데스리가에서 5시즌을 뛴 그는 19골 밖에 기록하지 못했다.

 

나카타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일본의 아이콘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페루자에서의 18개월과 로마에서 잠깐 번뜩이는 활약을 보여줬던 나카타는 이후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바르셀로나의 레전드 알칸타라는 특이한 케이스다. 첫째로, 그가 필리핀을 3살의 나이로 떠났고 태어난 나라보단 스페인 대표팀에서 더 많이 뛰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의 전성기가 1920년대였기 때문이다 – 세계 무대에서 진정한 존경을 받는 대부분의 다른 선수들보다도 까마득한 옛날에 뛰었던 선수이고, 심지어 라리가 창설 전에 전성기를 겪었기에 현대의 다른 선수들과 그를 비교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제 손흥민의 진짜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두 선수가 남는다. 박지성은 아시아 축구 연맹에 속하는 나라를 대표하면서 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들었던 유일한 선수이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빅이어를 차지한 2008년 결승전에 명단 제외되긴 했다) 세 번의 다른 월드컵에서 득점을 기록한 두 명의 AFC 선수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다른 선수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사미 알-자베르).

 

차범근은 1980년대 분데스리가에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 바이엘 레버쿠젠의 UEFA 컵 우승에 일조하며 아주 큰 성공을 거둔 공격수였다. 토트넘에 이적하기 전 레버쿠젠에서 뛰었던 손흥민은 그와의 비교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전형적인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정말 영광스러워요. 차범근 감독님과의 비교하기엔 제가 아직 부끄럽네요.” 지난 시즌 차범근의 유럽 리그 골 기록을 넘어선 후 손흥민의 발언이다.

 

박지성과 차범근은 그들의 이력서에 더 많은 트로피를 써낼 수 있다 – 반면 손흥민은 아직 클럽 트로피를 따지 못했다 – 하지만 과연 그들이 손흥민보다 높은 기량을 지닌 선수였다고 할 수 있을까?

 

박지성은 영리한 선수였지만 손흥민 정도의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진 못했다. 손흥민과 비슷하게 주력과 드리블 능력, 테크닉과 뛰어난 골 결정력을 선보였던 차범근이 좀 더 비교 대상이 될 만하다.

 

1년 전 손흥민은 발롱도르 투표에서 22등에 올라 AFC 소속 선수 최고 순위를 기록했다 – 물론 1995년까지 발롱도르는 유럽 선수들에게만 시상됐으니 차범근과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하겠지만, 두 선수가 역대 아시아 선수들 중 세계 무대에서 가장 크게 인정받는 이들이라고 평가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한편, 마네의 아프리카 최고 선수 자리를 향한 경쟁자들은 훨씬 위협적이다. 올해의 아프리카 축구선수 4회 수상자 사무엘 에투, 중원을 혼자 휘젓는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 야야 투레, 1995년 피파 올해의 선수상 수상자 조지 웨아, 별 말이 필요 없는 아베디 펠레와 디디에 드록바, 그리고 아프리카 올해의 선수를 2회 수상해 마네보다 트로피를 하나 더 갖고 있는 리버풀 팀 동료 모하메드 살라까지, 대단한 선수들이다.

 

그러나 아프리카 올해의 선수 수상 횟수는 다음달에 2-2가 될 수도 있는 노릇이다. 또한 리버풀 팬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비공식 여론 조사에서는 살라보다 골은 적지만 창의적인 패스와 빌드업 관여, 볼 탈취를 통해 팀에 기여하는 마네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으로 나왔다. 마네는 왼쪽, 오른쪽, 중앙을 모두 소화하면서 일관적인 폼을 유지할 수 있는 전 세계에도 몇 없는 선수들 중 하나다. 물론, 손흥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오늘 밤 머지사이드에서 벌어질 대결에 비견될 만할 경기가 실제로 있긴 했는가?

 

차범근은 대표팀에서 아프리카 팀을 상대해본 적이 없었고, 1980년대 분데스리가에는 유명한 아프리카 선수들도 거의 없었다. 그는 로저 밀러나 라바 마제르 – 당시 아프리카 축구계의 전설로 군림했던 두 선수 – 를 유럽 대항전에서 만나지도 않았다.

 

당신은 박지성이 에투, 투레, 드록바 같은 선수들을 상대했던 것을 지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박지성은 언제나 맨유의 중심에 있지 않았고, 자신만의 ‘임무’를 수행하며 상대를 틀어막기 위해 – 때로는 그 상대가 맨체스터 더비의 투레가 되기도 했다 – 뛰었지, 팀을 이끄는 퍼포먼스를 선보이진 못했다.

 

손흥민과 마네의 대결은 완전히 다르다. 그들은 양 팀에서 가장 위협적인 공격수라고 평가받을 만하다. 이번 경기는 18개월 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맞붙었던 팀들 간의 대결이다 – 그와 동시에, 18년 전 한국과 세네갈이 세계 축구에 끼쳤던 충격의 영향을 보여주는 경기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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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링크: Michael Cox 2020.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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