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엘사 사단의 코치들은 누굴까? [디 애슬레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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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엘사 사단의 코치들은 누굴까? [디 애슬레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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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콰이로가, 코르베란, 레예스가 마르셀로 비엘사를 둘러싸고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20199월 23일 자 기사입니다. 따라서 '올 시즌' 혹은 '이번 시즌'은 2019-20시즌을, '지난 시즌'은 2018-19 시즌을, '지난해'는 2018년을 뜻한다는 점 등을 인지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현재 상황과 다른 내용이 다수 있을 수 있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파블로 콰이로가, 디에고 레예스, 디에고 플로레스라는 비엘사 사단의 핵심 멤버들에 관한 글입니다. 이 셋의 이름은 알아두시고 글을 읽으시면 보다 이해가 쉬울 듯하네요.

 

‘El Loco’. 
스페인어로 ‘광인’이라는 뜻입니다. 
마르셀로 비엘사 감독의 별명이죠. 
괴팍한 성격에, 축구에 미친 그에게 잘 어울리는 별명입니다. 
저는, 그런 비엘사가 궁금했습니다. 
저렇게 해도 시즌 운영이 될까? 
처음 감독을 시작했을 때에도 지금 같은 전술을 구사했을까?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고 또 누구에게 영향을 줬을까? 
그리고 어떻게 저런 감독이 있을까? 
‘비엘사 시리즈’는 그런 연유에서 탄생했습니다. 
누구보다 비엘사 전문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에 대한 글들을 번역해보기로 마음먹었죠. 
축구계의 진정한 광인, 비엘사에 대해 알아봅시다.

 

 

그는 그가 태어난 칠레의 도시 이름을 딴 쿠리코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는 마르셀로 비엘사를 동경했고 비엘사가 칠레 국가대표 감독 자격으로 쿠리코에 방문했을 때, 16살의 펠리페 카네테는 그에게 편지를 썼다.

 

카네테는 축구, 코칭, 전술과 포지션 분석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는 비엘사에게 조언을 듣고 싶었고, 그의 사단에 합류해 같이 일한다는 이뤄지지 못할 꿈을 갖고 있었다. 비엘사는 그의 편지를 읽었고, 신중하게 생각해본 뒤 카네테에게 150개의 공식 경기를 보고 논평을 보내보라는 답장을 보냈다.

 

몇 달 뒤, 비엘사의 탁상에 공책 하나가 도착했다. 카네테는 아주 기본적인 도구들만 사용할 수 있었다 TV와 케이블뿐이었죠. 지금 일반인들도 쓸 수 있는 (분석적인) 시스템은 하나도 없었어요. 또한 당시 칠레의 환경이 2010년 대지진을 겪은 이후 황폐해져 있었지만 카네테는 축구 보는 데에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서 페이지를 채워 나갔다. 150번째 경기 분석이 끝나고, 카네테는 서류 뭉치를 우체통에 넣었다.

 

전 세계에서 펼쳐지는 경기들을 담았죠. 그는 본지 인터뷰에서 말했다. 여러분도 그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거예요. 비엘사는 국가대표팀 감독이었고 카네테는 그의 분석이 칠레 경기로만 제한하면 조금이라도 가치를 지닐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카네테의 노력은 굉장했지만 그 값어치를 했다. 비엘사는 그의 분석을 칭찬하면서 카네테 같은 사람들이 연락을 받고 찾아가는 자신의 서재로 초대했다. 당시 카네테는 겨우 17살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프로축구부터 가장 낮은 수준의 아마추어 대회까지 추종자를 두고 있는 비엘사의 명성은 축구라는 스포츠 전역에 퍼져 있다. 그러나 그는 거의 이름이 없다시피 한 명성이 아주 낮은 보좌진들과 수년간 함께 하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 비엘사의 리즈 유나이티드 부임 이후 그에 대해 찾아본 사람이라면 비엘사를 향한 충성심으로 잉글랜드에 따라온 세 남미인들 파블로 콰이로가, 디에고 레예스, 디에고 플로레스 에 대해서는 더 잘 알 것이다.

 

콰이로가와 레예스는 10년도 넘는 시간 동안 비엘사를 보좌해왔다. 플로레스는 6년 전 그의 사단에 합류했고 이젠 다른 이들처럼 신뢰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무명이었던 그들이 어떻게 비엘사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되었는지 는 수수께끼와도 같다. 그들은 인터뷰를 하지도,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그들은 비엘사가 오면 오고 가면 간다. 이 세 명 모두 비엘사와 우연히 연이 닿아 서로를 알아보면서 팀에 합류하게 됐다는, 카네테와 비슷한 스토리를 갖고 있다. 그들은 비엘사가 언제나 사랑하는 대담하고, 지치지 않으며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스타일의 사람들이다.

비엘사의 보좌진들은 어마어마한 양의 훈련, 분석, 경기 준비를 분담한다. 그는 최측근에 총 네 명을 두고 있고 콰이로가, 레예스, 플로레스, 그리고 비엘사가 리즈에 부임하면서 그대로 직책을 유임한 U-23팀의 감독 카를로스 코르베란 (역주-현재는 허더스필드 타운의 감독을 역임 중이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압박은 장난이 아니다. 그들은 오전 8시부터 업무를 하고 오후 6시 전에는 거의 쏠프 아치(역주-리즈의 훈련장)를 떠나지 않는다. 어떤 날엔 그들은 다른 이들이 불을 끄고 집에 갈 때까지 컴퓨터를 노려보면서 파일들을 정리하기도 한다. 비엘사가 요구하는 정보의 양은 엄청나고 타협도 불가능하다. 지난 시즌 리즈의 프렌치 인턴이 더비 카운티의 훈련장을 염탐하다 발각된 것도 이 때문이다. 한 소식통은 본지에 비엘사와 그 일원들은 모든 걸 살펴보고 미리 모든 게 준비되어 있길 바라요.”라고 전했다.

 

이게 바로 비엘사가 항상 행해왔던 방식이기에, 코르베란만이 익숙해져야 했다. 마르세유 시절 비엘사의 코치진이었던 얀 반 바인켈은 레퀴프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마르세유에서) 일했던 16달 동안 우린 고작 4, 5일밖에일 밖에 못 쉬었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 마르세유 선수는 레예스에 대해 그의 손에서 컴퓨터가 떠나는 걸 본 적이 없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리즈의 선수들도 똑같은 말을 할 것이다. 훈련 세션에서는 태블릿을 끊임없이 체크하고, 경기 중에는 더그아웃에서 노트북이 돌아간다. 모든 일의 최전선에는 테크놀로지가 있다. 리즈는 지난해 쏠프 아치 1층 기자회견실에서 복도를 따라가면 나오는 선수들의 휴게실 바로 옆에 코치진을 위한 전용 공간을 만들었다. 훈련 때면 항상 양쪽이 모두 바쁘다. 코치진의 방은 조용하지만 부지런히 스크린을 들여다보면서 영상을 스캔한다. 언제나 한 번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비엘사는 그의 코치진을 전격 신임하고 그들은 그에게 충성한다. 그 존경심은 경기 시작 전에도 잘 드러난다. 비엘사가 그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파란 박스에 쪼그려 앉는 자세를 취하면 콰이로가, 레예스, 플로레스, 코르베란은 그 주위를 맴돈다. 경기가 고조되면, 그들은 테크니컬 에어리어 안에서 점프를 하면서 앞에 있는 선수에게 지시 사항을 일러준다. 지난 달 리즈가 패배했던 리그컵 스토크 시티 전을 지켜본 한 스카우트는 보좌진이 태그팀(역주-두 명의 레슬링 선수들로 이뤄진 팀을 말한다)처럼 날뛴다라고 말했다. 콰이로가는 테크니컬 에어리어 한편에 자리를 잡고 뒷짐을 지는 걸 좋아한다. 코르베란은 대개 가장 활발한 리액션을 보여주고 플로레스는 그리 눈에 띄지 않는 편이다. 이들 모두 경고를 받아본 경험이 있다. 그들은 비엘사의 강렬한 눈빛을 잘 알고 있다.

 

비엘사가 공식적으로 보좌진을 거론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그의 입에서 코치진에 대한 조금이라도 깊은 정보가 나온 적도 없다. 콰이로가, 레예스, 플로레스의 경우, 비엘사가 경기 전후 기자회견에 그들을 통역으로 데려올 때 잠깐 동안만 미디어에 모습을 드러내고 마는 수준이다. 리즈는 비엘사가 새 감독으로 취임식을 했던 밤처럼 전문 통역사를 고용하는 걸 마다하지 않지만, 비엘사는 자체 스태프들과 함께하는 걸 선호한다. 지난 시즌 비엘사의 통역을 도맡았던 프랑스 국적 통역사 살림 라므라니가 이번 여름 클럽을 떠나면서 아르헨티나 출신 플로레스가 기자회견에 자주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유나이티드의 코칭스태프들은 계속해서 열심히 업무를 하고, 리즈에는 이 4명의 정확한 역할과 책임에 대해 전적으로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의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으며, 그 누구도 콰이로가보다 비엘사를 잘 알지 못한다. 37살의 콰이로가는 아르헨티나의 콜론 출신으로, 변변치 못한 지역에서 분석적인 재능을 찾아내는 비엘사의 습관의 덕을 본 첫 인물이다. 그는 마르셀로에게 빚을 많이 졌죠.” 8살때부터 콰이로가의 절친이었던 후안호 스파누올로는 말한다. 그게 바로 콰이로가가 마르셀로에게 충성을 다하는 이유예요. 그에겐 충성이 중요하거든요.

콜론은 부에노스 아이레스 북부에 위치한 25,000명이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다. 그곳은 콰이로가의 고향이고 무직 상태였던 시절 그는 콜론을 향했었다. 콰이로가와 스파누올로는 초등학생 나이부터 함께하기 시작했고, 둘 모두 지역 팀 아틀레티코 엘 포르틴에서 축구를 했다 (2003년에는 그들이 포르틴의 리그 우승을 돕기도 했다). 엘 포르틴은 아마추어 지역팀이고 자원 봉사자들에게 모든 걸 의지한다. 아무도 우리가 하는 일에 임금을 주지 않아요. 5년 간 엘 포르틴의 회장직을 맡았던 스파누올로는 말했다.

 

콰이로가는 학업을 마친 뒤 피지컬 트레이너 자격을 취득했고, 비엘사가 그를 알기 전까지 콰이로가는 꽤나 조용한 삶을 살았다. 그는 가능할 때마다 엘 포르틴을 돕길 좋아했으며 지금도 아르헨티나에 돌아가면 무상으로 재능 기부를 하고 있다. 장남 아우구스토도 현재 엘 포르틴에서 선수로 뛰고 있다. “콰이로가는 여기 올 때마다 우리 팀에 필요한 것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도와주죠. 스파누올로는 말했다. 우리의 불안정한 재원을 지키기 위해 직접 삽을 들고 약간의 유지 보수 작업을 하거나 청소년 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훈련과 관련된 노하우를 알려주는 것 등이 될 수 있겠죠.

 

“콰이로가는 엄청나게 프로페셔널하고 충실한, 가족을 소중하게 여기는 겸손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는 절대 잘난 체를 하지 않죠. 콰이로가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행적과 성취에 관해서) 말하거나 자신이 가진 전문성과 지식을 내보이려는 모습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콰이로가는 두 사람과 모두 친분이 있는 호라시오 가르시아를 통해 비엘사와 연을 맺었다. 비엘사와 가르시아는 함께 자라왔고 벨레즈 사르스필드에선 가르시아가 비엘사의 수석코치를 하기도 했다. 2007년 비엘사가 칠레 감독을 맡기 얼마 전 콰이로가의 이름이 둘의 대화에서 오르내렸고, 엘 포르틴에서의 그의 헌신을 전해 들은 비엘사는 콰이로가와 약속을 잡았다.

 

콰이로가의 첫 임무들 중 하나는 2006 월드컵 아르헨티나의 퍼포먼스와 공격 방식을 담은 그들의 전술적 형태에 대한 상세한 리뷰와 분석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카네테도 경험했듯이, 분석적인 기지로 도움을 준 것에 대한 대가로 비엘사가 일을 제안하는 것은 빈 말이 아니었다. 비엘사에 대한 내 첫인상은 정말 중요한 사람이라는 거였고 그가 나와 통화하고 말하기 위해 시간을 쓰고 있었죠. 카네테는 말했다. 그래서 난 (실제로 비엘사와 함께 일할 가능성을)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냥 내가 준비해온 걸 했을 뿐이죠. 콰이로가의 첫 분석은 합격점을 받았다.

 

조금씩 콰이로가에게도 기회가 오기 시작했다. 전 보카 주니어스 미드필더였던 알프레도 베르티가 칠레의 코치진에서 사임했고 콰이로가는 비엘사의 넘버 투 에두아르도 베리쪼 (세비야와 아틀레틱 빌바오를 감독했던 또 다른 비엘사의 제자. 현재는 파라과이 감독직을 맡고 있다)와 함께 일하는 단계까지 올라섰다. 베리쪼가 콜롬비아와의 지역 예선에서 벌인 언쟁으로 터치라인 접근 금지 징계를 받자 콰이로가는 2010 월드컵 조별 예선에서 벤치에 앉게 되었다. 콰이로가는 이에 대해 겸손하게 “베리쪼가 수석코치고 그가 돌아오면 다시 비엘사의 옆으로 갈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베리쪼는 2010년 자신만의 감독직을 구하기 위해 코치를 그만뒀다. 콰이로가는 비엘사의 곁에 남으면서 다시 한 단계 올라섰다. 그는 이제 비엘사와 운명을 같이 했다. 비엘사는 무직 상태로 꽤 시간을 보내면서 이력서에 공백이 생겼고, 일을 갑자기 관두는 습관이 거의 모든 임기에서 도드라졌다. 그러나 콰이로가는 그 사이에 다른 일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직에 딱히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레예스와 플로레스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엘사를 돕는 것을 보면 충분히 야심 차지만,그들 자신이 팀을 총괄하거나 대중적인 명성을 높이려는 욕망을 갖고 있진 않았다.

 

파블로는 비엘사의 결정을 기다리면서 이직 제의들을 거부했어요. 스파누올로는 말했다. 그는 언제나 마르셀로와 함께 일하는 걸 최우선으로 생각했죠. 이것이 바로 콰이로가가 비엘사와 함께 빌바오로, 마르세유로, 릴로, 그리고 리즈로 갔던 이유다. 그는 이적에 관한 언쟁이 지속되던 가운데 비엘사의 임기가 이틀도 채 가지 못했던 라치오에도 따라갔을 것이다.

 

비엘사는 그가 지도하는 선수들과 친해지는 경우가 드물다. 사적인 레벨에서는 거리를 유지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는 언젠가 자신이 정말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될까 봐 선수들과 너무 가까워지는 걸 걱정한다고 말했다. 그의 코치진도 축구에 전념하고 코르베란은 지난 시즌 필자에게 우리가 여기 온 이유는 일을 하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쏠프 아치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과 가깝게 지내는 건 아니지만 콰이로가는 마르세유에서 인기가 많은 코치였다고 한다. 긍정적이고 호감형인 성격이기에 몇몇 선수들은 특히 그와 친하게 지냈다.

 

잉글랜드에서 콰이로가는 집과 멀리 떨어져 살아야 했고 시간과 비자가 허용될 때만 어린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아내 시메나와 아이들은 올 시즌부터 리즈에 머무르고 있으며 그가 지난달 노팅엄 포레스트와의 1-1 무승부 이후 아이들을 데리고 엘런 로드 근처를 산책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콰이로가는 여기까지 커리어를 쌓는 데에 거의 모든 것을 바쳤지만, 스파누올로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그는 축구에 정말 열정적이에요. 콰이로가는 자신이 하는 일이 많은 시간과 노력, 가족의 헌신을 요했다는 걸 알고 있죠.

 

콰이로가의 엘 포르틴에서의 코칭과 가르시아의 언급이 비엘사의 귀에 들어가면서 그가 비엘사 사단에 합류하는 계기가 되었다. 칠레의 나시미엔토에서 나고 자란 레예스의 경우, 비엘사와 그의 인연은 카네테의 경우보다 훨씬 직접적이었다. 말 그대로, 레예스는 문을 두드렸다.

마르세유 시절 레예스가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컴퓨터와 붙어있는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간을 훈련장에서 보냈다는 것이었다. 그는 몇 시간 동안 훈련장에 머물러 있는 걸로 잘 알려져 있죠. 프랑스의 프리랜서 축구 저널리스트 모하마드 알리는 말했다. 레예스는 비엘사가 마르세유에 부임하기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비엘사는 아슬레틱 빌바오를 떠나고 1년이 지난 20146월 마르세유 감독직을 수락했다. 그러나 레예스는 클럽을 평가하고 퍼스트팀뿐만 아니라 유스팀 선수단까지 기용 가능한 선수들에 대한 보고서를 정리하기 위해 그보다 한 달 먼저 유럽에 도착해 있었다. 그가 리즈에서 하고 있는 것처럼, 비엘사는 마르세유에서도 수비수 스테판 스파라냐와 골키퍼 줄리앙 파브리를 포함해 수많은 유망주들을 발굴해냈다.

 

레예스는 비엘사의 엄청난 모범생이자 지칠 줄 모르는 조수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비엘사는 그의 선수들과도 타협을 하지 않지만 스태프들과는 훨씬 더 그런 면모를 보인다. 그래서 비엘사는 마르세유 시절 뭔가 상황이 잘못 흘러가거나 콘 또는 마네킹이 조금이라도 제 위치에서 벗어나 있으면 엄하게 꾸짖는 것으로 유명했다. 한 번은 레예스, 콰이로가, 그리고 다른 코치들이 모두 마르세유가 프리시즌 친선경기를 하는 중 경기장을 떠나야 했다. 그의 또 다른 코치인 프랭크 파씨는 형편없는 훈련 세션에 대한 처벌이었다고 말했다. (비엘사)는 어느 때든 가리지 않고 화를 낼 수 있어요. 알리는 말한다. 난 그 분노가 바로 비엘사 사단의 디테일한 준비의 원천이라고 생각합니다.

 

레예스는 칠레 산티아고에 위치한 국립 축구 협회에서 자격을 딴 것을 제외하면 프로 축구와는 접점이 없었던 체육 교사였다. 어느 날, 레예스는 예고도 없이 칠레의 지도자 교육 시설 후안 핀토 듀란을 떠나 비엘사의 밑으로 들어갔다. 그의 목표는 카네테와 동일했다. 자신을 증명할 기회를 요구하고 비엘사에게 자신을 고용해달라고 하는 것. 그것이 레예스의 목표였다. 한때 칠레 축구협회 회장이었던 해럴드 매인-니콜스는 레예스에 대해 능력이 매우 뛰어나고 성실하며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힘쓰는 사람이라고 했다. 비엘사는 그의 워크에씩을 존중했고, 레예스는 순식간의 비엘사 사단의 당당한 일원이 됐다.

 

38세의 레예스는 비엘사의 오퍼를 받아들인 카네테와 가장 처음 친해진 사람들 중 하나였다. 내가 도착했을 때 레예스는 거의 2년 정도를 비엘사와 함께 일하고 있었어요. 그는 모든 지원 스태프와 다른 시스템들을 총괄했죠. 카네테는 말했다. 디에고는 나를 환영해줬고 그때부터 우리의 우정과 협업이 시작됐죠.

 

그는 정말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에요. 맡은 일에는 최선을 다하는 천재이고, 마르셀로에게 100% 헌신하죠. 디에고는 본보기가 되는 사람이에요. 비엘사는 우리 둘에게 정말 중요했죠. 우린 지식을 정말 크게 발전시킬 수 있었어요. 하지만 나는 디에고야말로 비엘사가 표하는 존중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는 그의 노력과 프로페셔널리즘으로 비엘사에게 존중을 받을 수 있었죠.

 

카네테와 비엘사는 칠레 시절 이후 서로 다른 길을 걸었지만 그는 중동에서 일자리를 잡았다가 이젠 다시 칠레로 돌아와 우니온 산 펠리페의 감독 게르만 코레니아의 수석코치를 맡고 있다. 그때의 경험 덕분에 내가 여태까지 축구계에서 일할 수 있었어요. 그는 말했다. 카네테와 레예스는 아직도 연락을 이어가고 있으며 카네테는 비엘사가 최고 권력으로 군림했던, 실수가 절대 용납되지 않았던 곳에서 고작 17살짜리 쿠리코가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줬던 레예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들은 정말 매력적인 대표팀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들만의 역할을 했고 흠이 있지만 용감하고 환상적인 칠레에서 비엘사는 여전히 정말 특별한 사람이다.

브라이언 콜먼은 더블린 외곽에 위치한 킹스우드 캐슬의 유소년팀을 운영하고 있었다. 아이들과 훈련하던 중, 콜먼은 한 남자가 공식 경기장에서 혼자 운동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남자는 핏을 끌어올리기 위해 일련의 달리기 훈련을 혼자 소화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훈련을 마치곤 주저앉아 콜먼과 아이들이 세션을 마무리하는 걸 지켜봤다.

 

그 후 흥미를 느낀 콜먼은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 남자는 자신을 디에고 플로레스라고 소개했다. 나는 그가 누구였는지 몰랐어요. 그래서 경계심을 갖고 다가갔죠. 콜먼은 말했다. 그는 어디에선가 나타났지만 우리는 말을 붙이기 시작했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가 축구를 아는 사람이고 우리가 뭘 하고 있었는지 유심히 보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거기에 더해, 그가 내 친구의 어머니의 집에 세 들어 살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왔죠 뭔가 이상한 우연의 일치지만 그가 이상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어요.

 

아르헨티나 출신 플로레스는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고 유러피안 코칭 자격증을 취득할 방법을 찾기 위해 (여러 웹사이트에 현재 그가 UEFA 프로 자격을 갖췄다는 정보가 뜬다) 아일랜드에 머무르고 있었다. 콜먼은 플로레스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웨이터로 일하고 있었고 아마 커피숍의 바리스타나 그 비슷한 거였어요 그가 킹스우드 성인팀에서 뛰게 된 후 그는 언제나 훈련에 조금씩 늦었다고 회상했다.

 

우리는 오후 7시에 훈련을 시작했고 그는 일을 마친 뒤 최대한 빠르게 달려와 오후 715분에 도착했죠. 그는 정말 열심이었어요. 아마 청바지를 벗고, 축구화를 신고, 바로 오는 식이었을 겁니다. 난 그가 그냥 축구를 사랑했다고 생각해요. 플로레스는 아일랜드인 한 무더기에 낀 외로운 남미인이었지만 아일랜드인들은 그를 반겨줬다. 그는 정말 신사답고 격조 있는 사람이었어요. 2013년 플로레스와 함께 뛰었던 킹스우드의 비서 스티븐 케네디는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콜먼은 말했다. 그는 내가 여태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친절한 축에 속했어요.

 

플로레스는 이십 대 때 스포르티보 벨그라노 같은 아르헨티나 하부리그에서 센터백으로 뛰었다. 지난해 플로레스에 관한 글을 썼던 에르난 로리노는 동료들이 그의 경기를 읽고 플레이를 지시하는 능력 때문에 그를 그라운드 위의 감독처럼 생각했다고 말했다. 아마추어 레벨의 콜먼도 비슷한 재능을 목격했다. 플로레스는 센터백이었지만 우린 그를 중앙 미드필더로 기용했어요. 그는 모든 걸 컨트롤할 수 있었거든요. 콜먼은 말한다. 그는 모든 면에서 한 단계 높은 선수였어요. 플로레스가 선발로 나서 득점을 올렸던 201310월 킹스우드와 마크 셀틱의 경기 자료는 온라인에 남아 있다.

 

코르도바에서 체육 학위를 취득하고 아르헨티나 지도자 협회 ATFA에서 자격증을 딴 플로레스는 콜먼의 킹스우드 유스팀 감독을 도왔다. 시작할 때에는 아이들이 디에고 같은 사람이 자신들을 가르친다는 걸 좀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콜먼은 말했다. 하지만 그가 세션에 돌입하면, 여러분은 그가 얼마나 풍부한 축구 지식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세션들은 천재적이었고 아이들도 그걸 좋아했어요. 디에고는 확실히 축구에 푹 빠져 있었죠. 플로레스는 경기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집을 구했다. 그의 트위터 계정에 처음으로 올라온 사진은 앞에 잔디밭 위에 예르바메이트 한 잔이 놓여 있는 더블린 현지 경기 사진이다.

 

콜먼은 그가 세미나와 다른 축구와 관련된 행사들에 참가하기 위해 주말을 잉글랜드에서 보냈다고 회상했다. 플로레스가 2013년 말 아일랜드를 떠났을 때, 그는 스포츠 업계에서 적당한 일자리를 찾으려 했다. 그는 사우스햄튼에서 일할 거라고 말했어요. 아마 정규직은 아니고 필요한 일을 조금씩 하는 역할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콜먼은 말했다. 20142월 플로레스는 당시 사우스햄튼의 감독이었던 마우리시오 포체티노와 찍은 사진을 트위터에 게재했다. 비엘사의 제자와 맺은 인연은 비엘사 본인과의 인연까지 이어졌다.

 

플로레스는 비엘사가 마르세유에서 한 시즌을 다 보내던 때에 레예스의 소개로 비엘사와 만났다. 비엘사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다. 플로레스의 배우고자 하는 열정과 코칭에 대한 몰두가 비엘사의 흥미를 끌었기에 그를 위한 자리가 마련됐다. 이젠 삼십 대 초반이 된 그는 또 하나의 chiquillos가 되었다(chiquillos란 비엘사 휘하의 인턴들을 칭하는 말이다. 스페인어로 아이들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나, 이 경우에는 견습생이라는 표현이 보다 알맞을 것이다). 비엘사의 한 동료는 디 애슬레틱에 말했다. 인턴이 기름 안에 잠수를 해서 한 시간 동안 숨도 안 쉬고 버틸 수 있다면, 그는 그제야 마르셀로의 스태프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는 거예요. 비엘사의 방식은 그만큼 힘들다.

 

플로레스는 아주 빠르게 비엘사의 인정을 받았다. 그는 콰이로가와 레예스보다 늦게 사단에 합류했지만 비엘사는 릴에서도 그에게 일자리를 줬고 지난여름 리즈와 협상할 때에도 그를 꼭 고용해야 한다는 조건을 넣었다. 그들은 비엘사와 함께 움직이고, 월급도 그에게 받는다. 마르세유는 전체 코치진 임금을 비엘사와 협상하고 비엘사가 다시 그 돈을 분배한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매우 관대하게 나눠진다고 한다). 리즈 역시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 비엘사는 그의 조수들과 함께하지만 그 사이의 관계는 당근과 채찍이 혼재한다. 두둑한 보수와 특이한 교육은 그들이 쓸 수 있는 모든 시간을 쓴 것에 대한 보상이다.

15개월 전 콰이로가, 레예스, 플로레스가 탔던 잉글랜드행 비행기는 무료 항공편이었다. 비엘사는 처음에 리즈와 12개월 계약을 맺었고 5월에는 클럽이 계약기간을 연장할 수 있는 조항을 넣었다. 그러나 그의 남미인 동료들은 비엘사가 여기 머무는 시간 동안에만 리즈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비엘사가 시간이 다 됐다고 판단해 전화기가 울리면 금방 또 다른 곳으로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축구계에서 가장 탄탄하게 묶여 있는 조직과도 같으며, 비엘사라는 종교의 가장 헌신적인 신자들이다. 리즈가 비엘사의 사임 이후 감독을 맡을 만한 내부적인 후계자를 양성하려 한다면, 코르베란이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 될 것이다(역주-초반에 나왔듯이, 코르베란은 현재 허더스필드 타운의 감독이다).

 

비엘사는 자신의 성격과 발전의 족적을 주변 사람들에게서 그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초라한 뒷배경, 분석에 대한 욕구, 다른 사람들이 모두 yes라고 할 때 혼자 no라고 할 수 있는 배짱까지. 아무리 목을 축여도 그치지 않는 축구에 대한 갈증이 있다. 비엘사와 그의 조수들은 16살 소년에게 150경기를 분석하라는 과제가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열정에 이끌린 사람들이다. 그게 바로 내가 해야만 했던 거예요. 카네테는 말했다. 난 마르셀로의 생각을 알고 그와 함께 일하기 위해선 그렇게 해야만 했죠.

 

지난 시즌 리즈의 주간 경기 일정이 얼마나 계속됐는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마지막 달에 리즈는 셰필드 웬즈데이를 꺾고 챔피언십에서 자동 승격에 가까워졌다. 위건 애슬레틱이 그들의 다음 상대였고, 그 다음날에는 노리치 시티를 만나야 했다.

 

비엘사는 DW 스타디움(역주-위건의 홈구장)에 자신의 눈들이 가 있길 바랐다. 한 쌍도, 두 쌍도 아니고 무려 여섯 명의 분석가들을 보냈다. 경기가 시작되고, 그의 직원 6명은 경기장 곳곳에 위치해 플레이를 지켜보면서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런 노력이 긍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내진 못했다 리즈는 성금요일(42)에 위건 홈경기에서 승격에 실패하는 패배를 당했다 그러나 이는 리즈 직원들의 휴가 일수도 마르세유의 반 바인켈과 비슷하다는 걸 보여준다.

 

그들은 경기날이 되면 킥오프 전부터 경기장에서 대기하다가 종료 휘슬이 울리면 곧바로 돌아간다. 그들은 자신들의 예상과 현실이 얼마나 비슷한지를 궁금해하면서 열정적으로 상대의 분석 자료들을 집어삼킨다.비엘사와 코치진은 그 어떤 경우에도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더 많은 정보를 위해 계속해서 다시 한번 돌아본다. 콰이로가는 비엘사 사단에 든 지 15년이 다 되어가고 2007년 이후 한 번도 비엘사의 팀에 빠진 적이 없다. 비엘사 사단에서는 그 누구도 쉬운 삶을 원하지 않는다. 리즈가 정말 빠르게 느끼고 있듯이, 비엘사는 중독성 있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물론 정말 어려운 일이죠. 스파누올로는 말했다. 하지만 그 (콰이로가)는 비엘사 덕에 다시 태어났어요. 그리고 절대 잊지 마세요 우리 아르헨티나인들은 축구를 숨 쉬듯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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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링크: Phil Hay 2019.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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