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LLY WRIGHT
빌리 라이트: 2009년 명예의 전당 입성
아이언브릿지의 소년은 한때 프랭크 버클리(역주-1927~1944 울브스 감독 재임) 감독에게 축구선수가 되기엔 너무 체구가 작다는 말을 들었고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전설적인 감독 버클리는 설득을 당해 그에 대한 생각을 재고했고, 그 다음 일들은 모두 역사로 남게 되었다.
윙-하프(역주-중앙 미드필더 중 왼쪽이나 오른쪽에 위치하는 미드필더)로 커리어를 시작한 라이트는 시간이 지나면서 센터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그는 경기를 읽는 능력을 바탕으로 주력의 부족을 모두 커버할 수 있었다. 라이트는 당시 울브스 최다 출장 수를 갈아치웠고, 국가대표팀에서 100경기를 뛴 최초의 선수가 되면서 축구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후 열 세 시즌 동안 그가 출전하지 못한 잉글랜드 대표팀 경기는 부상과 이후 떨어진 폼으로 인해 결장한 세 경기 뿐이었다. 그러나 라이트는 복귀한 뒤 다시 최고의 수비수의 면모를 보여줬고, 1952년에는 올해의 축구선수 상을 수상했다. 그는 삼사자 군단의 로고를 가슴에 달고 70경기를 연속으로 뛰었으며, 주장 완장을 달고는 90경기에 출전했다. 후세의 바비 무어 역시 주장으로 90경기를 치렀다. 라이트는 CBE(역주-대영제국 훈장 사령관)와 FA 종신 위원으로 추대된 1959년 은퇴하기 전까지 울브스를 1949 FA 컵과 세 번의 1부리그 타이틀 우승으로 이끌었다.
출생일: 1924년 2월 6일, 아이언브릿지
사망일: 1994년 9월 3일
울브스에서 뛴 기간: 1938~1959
490경기 13득점
국가대표 기록: 잉글랜드 105경기 3득점
RON FLOWERS
론 플라워스: 2009년 명예의 전당 입성
하프백(역주-당시에는 미드필더를 의미했던 것으로 보인다)의 힘은 1950년대 울브스의 성공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울브스의 요크셔 지부 유소년 팀 워스 원더러스의 졸업생 론 플라워스는 그 시대 미드필더의 대명사와도 같았다.
빼어난 태클 실력을 가졌던 그는 수비를 통해 동료에게 기회를 만들어주거나 극적인 골을 넣을 발판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울브스가 처음으로 잉글랜드의 챔피언으로 등극한 1954년 팀의 핵심 멤버였던 플라워스는 경기력이 안 좋았던 적이 거의 없는 선수였다. 그는 스파르타크, 혼베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승리했던 경기들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또한 플라워스는 1957-58 시즌과 1958-59 시즌의 리그 우승 팀과 1960 FA 컵을 우승할 때에도 울브스에 있었다. 그는 잉글랜드 대표팀 데뷔전에서 최악의 경기를 가졌지만 이후 마흔 번 연속으로 경기를 뛰면서 그의 팀 동료 빌리 라이트에 이어 두번째로 긴 대표팀 연속 출장 기록을 세웠다. 이후 플라워스는 잉글랜드에서 완장을 차고 세 경기를 치렀으며 6번의 페널티를 차 모두 성공시켰다. 그는 4경기 연속 골을 득점하기도 했다.
출생일: 1934년 7월 28일
울브스에서 뛴 기간: 1951~1967
512경기 37득점
국가대표 기록: 잉글랜드 49경기 10득점
DEREK PARKIN
데릭 파킨: 2009년 명예의 전당 입성
그 어떤 선수보다도 울브스에서 많은 경기를 뛴 풀백을 묘사하는 데에는 많은 단어들이 쓰인다. 항상 여유로운 것처럼 보였던 파킨의 플레이를 보면 ‘완벽’이나 ‘꾸준함’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른다. 그는 결정적인 태클을 해냈고 빠른 스피드를 통해 볼을 쉽게 뺏아왔다.
파킨이 1968년 허더스필드 타운에서 영입됐을 때 그의 이적료 8만 파운드는 풀백 최고 이적료였다. 요크셔는 론 스타니포스, 레이 윌슨, 밥 맥냅 같은 좋은 풀백들을 다수 길러냈고, 파킨이 그들처럼 잉글랜드에서 뛰지 못했다는 사실은 상당히 놀라운 점이다. 그는 확실히 대표팀에서 뛸 만큼 좋은 선수였고, 변함없는 퍼포먼스를 통해 팀의 ‘Mr. Reliable’로 등극했다. 그가 1972-73 시즌의 절반 이상을 뛰지 못하게 만든 원인 미상의 질병이 아니었다면, 파킨의 출전 기록은 630경기 정도까지 늘어났을 것이다. 파킨은 울브스의 1974년과 1980년 리그컵 우승팀의 주역이었고 단일 시즌 50경기 이상 출전을 5번이나 기록했다.
출생일: 1948년 1월 2일 뉴캐슬-어폰-타인
울브스에서 뛴 기간: 1968~1982
609경기 10득점
JACKERY JONES
재커리 존스: 2009년 명예의 전당 입성
1900년대의 풀백은 간단명료한 플레이를 하는 선수들이었고, 재커리 존스는 그 전형과도 같았다.
존스는 상대 윙어들의 악몽과도 같았고, 팀을 위해 모든 걸 바쳤다. 그는 울브스와 같은 해에 탄생했고, 10년 이상 팀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존스는 1901년부터 이후 여섯 시즌 중 다섯 시즌 간 모든 경기에 출전했다. 그는 리그에서 300경기 이상을 뛴 최초의 울브스 소속 선수가 되었고 1904년 벨파스트에서 열린 아일랜드 리그와의 풋볼리그 경기에 선발됐다. 존스는 크리스탈 팰리스에서 열린 1908년 FA 컵 결승전에서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3-1로 꺾을 때 단단한 수비를 구축했다. 그의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수비는 툰을 좌절시켰다. 존스는 발목 부상의 후유증으로 은퇴한 뒤 클럽의 어시스턴트 트레이너가 되었다. 그는 후배 선수들에게 큰 영향을 줬고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시계줄에는 우승 메달을 자랑스럽게 차고 다녔다.
출생일: 1877년 3월 16일 웰링턴
사망일: 1945년 8월 20일
울브스에서 뛴 기간: 1900~1912
334경기 16득점
STEVE BULL
스티브 불: 2009년 명예의 전당 입성
울브스가 암흑기에 있었을 때, 그들에겐 의지할 선수가 필요했다. 스티브 불은 그런 선수였다.
그는 앤디 톰슨과 함께 알비온에서 울브스로 이적했고 두 선수는 클럽이 명성을 되찾는데 핵심으로 활약했다. 울브스가 4부리그와 3부리그를 두 시즌 연속으로 우승하고 셰르파 반 트로피까지 들었을 때, 불은 잉글랜드 축구사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엇다. 그는 두 시즌 연속으로 클럽에서 50골을 득점한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팬들은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불은 어느 각도와 거리에서도 골을 넣을 수 있었고, 언제나 100%를 쏟아 부었다. 1989년 그는 잉글랜드 국가대표에 차출된 3부리그 선수들의 라인에 합류했고, 스코틀랜드 전에 교체로 출전해 득점을 올렸다. 이후 불은 잉글랜드 대표팀에서 13경기를 뛰면서 4골을 넣었다. 그가 국가대표에서 받은 출전 시간은 6경기 반 정도에 불과했다. 부상이 그의 커리어를 끝내버렸을 때, 불은 306골을 득점했고 18번의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그는 MBE(역주-대영제국 훈장 구성원)를 수여받았다.
출생일: 1965년 3월 28일 팁톤
울브스에서 뛴 기간: 1986~1999
561경기 306득점
국가대표 기록: 잉글랜드 13경기 4득점
STAN CULLIS
스탠 컬리스: 2009년 명예의 전당 입성
그가 엘즈미어 포트에서 울브스에 합류했던 수요일부터, 스탠 컬리스는 재능 있는 선수일 뿐만 아니라 타고난 지도자였음이 분명하다.
그는 19살의 나이에 울브스의 주장 완장을 달았고 23살 생일 이틀 전에는 잉글랜드의 주장이 되었다. 센터백으로서 그는 경기를 지배했고 볼을 완벽하게 컨트롤했다. 컬리스는 압박을 받을 때 드리블을 하면서 위험 지역에서 벗어났다 –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감독이 된 후 수비수가 이런 플레이를 하면 그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울브스가 1930년대 후반 잉글랜드 축구의 화제에 오르내렸을 때, 그들은 2번이나 1부리그 준우승을 차지했고 완벽한 탑독이었던 1939 FA 컵 결승에서도 포츠머스에게 패했다. 전쟁 직후 시즌에도 울브스는 마지막 경기에서 최종 우승팀 리버풀에 승점 3점을 내주면서 다시 한번 고배를 마셨다. 그 경기는 선수로서 컬리스의 마지막 경기였다. 하지만 그는 1948년 울브스의 지휘봉을 잡은 이후 FA 컵 우승과 세 번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기념 경기들에서도 승리를 쓸어 담았다. 컬리스는 1964년 경질될 때까지 거의 30년을 울브스와 함께했다.
출생일: 1916년 10월 25일
사망일: 2001년 2월 27일
울브스에서 뛴 기간: 1934~1947(선수) 1948~1964(감독)
171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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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링크: Wolves Hall of Fa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