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부활과 만치니의 두번째 기회: 아주리는 어떻게 벼랑 끝에서 돌아왔는가 [디 애슬레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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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부활과 만치니의 두번째 기회: 아주리는 어떻게 벼랑 끝에서 돌아왔는가 [디 애슬레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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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만치니, 드디어 이탈리아와 함께하는 감독 (photo: Nicolo Campo/LightRocket via Getty Images)

 

마르코 타르델리(역주-전 이탈리아 국가대표 선수, 1982년 결승전 서독을 상대로 2-0을 만드는 골을 득점)가 앤디 워홀과 이야기를 나누고 루 리드(역주-미국의 록 가수,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리더)가 알 파치노와 시간을 보내는 로베르토 만치니의 관심을 끌기 위해 소리를 지르고 칼 라거펠트(역주-독일의 디자이너, 20세기 후반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가 벽에 몸을 기댄 채로 지켜보는 상황을 생각해봐라. 그날 스튜디오 54(역주-뉴욕의 나이트 클럽)의 밤은 만치니가 그의 국가대표팀과의 관계를 끝내지 않은 이유와 이제는 유로에 출전하는 이탈리아의 감독으로써 선수 시절엔 놓쳤던 것을 성취하려는 그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 설명해준다. “로비(역주-만치니의 애칭), 이제 아침 5시야” 타르델리는 고함을 쳤다. “난 지금 호텔로 돌아가고 있어. 올 거야, 아님 더 오래 남을 거야?”

 

당시 겨우 19살이었던 만치니는 그의 팀 동료들을 따라 도어맨을 지나쳐 빅 애플(역주-뉴욕을 뜻함)의 새로운 날에 내리쬐는 강한 햇빛을 맞았다. 그의 귀는 아직도 웅웅거렸고, 그는 오랜만에 보는 빛에 눈을 찡그렸다. 때는 1984년 5월, 이탈리아가 세계 챔피언으로 군림하던 시절이었다. 대표팀은 자이언츠 스타디움에서 미국과 친선 경기를 갖기 위해 뉴욕에 방문했다. 파이프를 태우길 좋아했던 당시 나치오날레(역주-이탈리아 축구 대표팀)의 감독 엔조 베아르초트(역주-무려 1975년부터 1986년까지 이탈리아의 감독으로 재직, 월드컵 1회 우승)는 만치니가 삼프도리아에서 보여준 퍼포먼스와 이탈리아의 차세대 축구 스타로써 인정받던 명성을 고려해 그를 처음으로 대표팀에 소집했다.

 

이탈리아 대표팀이 묵는 센트럴 파크 옆에 위치한 숙소의 로비를 걷던 만치니는 한 스태프에게 끌려가야 했다. 그 스태프는 “베아르초트 감독님이 식당에서 너를 기다리고 계셔. 조심해. 아주 화가 나셨을 테니까.” 라고 경고했다. 만치니는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베아르초트는 최대한 화를 참으면서 분노를 표현했다. “내 삶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순간이었죠.” 만치니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이름 있는 칼럼니스트 파올로 콘도에게 말했다. “그때 저는 그에게 온갖 소리를 다 들었어요. 걱정하느라 한숨도 못 잤다면서 제가 바보 같은 짓을 했다고 했습니다. 제가 리그에서 40골을 넣는 일이 있더라도 다시는 대표팀에 부르지 않을 거라고도 했죠.”

 

베아르초트는 그의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만치니는 토론토에서 대표팀 데뷔전을 치른지 일주일 만에 아주리 커리어를 끝낼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때의 기억은 아직까지도 그에게 굴욕으로 남아 있다. 몇 년 뒤 만치니가 베아르초트를 우연히 마주쳤을 때, 그는 왜 자신을 쓰지 않겠다는 생각을 절대로 바꾸지 않았는지 따졌다. 어쨌든 만치니 본인은 이후 감독이 되어서도 마리오 발로텔리에게 수많은 재기의 기회를 주었다. “베아르초트는 ‘나는 네가 전화를 걸어 다시 대표팀에 소집해달라고 부탁하기를 기다렸다. 한 마디의 사과도 없이 내 결심을 바꿀 수는 없지. 그것 때문에 너는 1986 월드컵을 놓친 거야’라고 말했죠.” 만치니는 풀이 죽은 채로 말했다. “죽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베아르초트는 멕시코 월드컵에서 16강 탈락에 그친 뒤 대표팀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그의 후임으로 부임한 U-21 팀 감독 출신 아젤리오 비치니는 만치니의 대표팀 합류를 환영했지만, 그리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지는 못했다. 만치니는 삼프도리아에서도 ‘영혼의 콤비’였던 지안루카 비알리와 환상적인 파트너십을 만들어내면서 유로 1988 개막전에 개최국이었던 서독을 상대로 득점포를 터트렸지만, 그 골은 행복감이 아닌 긴장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 골이 들어갔던 순간의 기쁨은 아직도 선명해요.” 비알리는 말했다. “하지만 로베르토의 리액션 역시 생생하게 기억이 나네요.”

 

서독 전 데뷔골을 넣고도 기자들을 향해 달려가는 만치니 (Photo: Peter Robinson – PA Images via Getty Images)

 

만치니는 아주리에서 그의 첫 득점의 기쁨을 만끽하는 대신 환호하는 동료들을 피해 잽싸게 달려가 프레스 박스 아래에서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경험이 더 많았던 알레산드로 알토벨리에게 밀려 만치니의 자리는 없을 것이라고 예상하던 저널리스트들을 저격한 것이다. 당시의 유로는 지금보다 짧은 8강 토너먼트로 진행됐고, 이탈리아 대표팀은 그 대회를 자국에서 열리는 1990 월드컵의 준비 과정으로 활용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발레리 로바노브스키의 소련에게 패하긴 했지만 4강까지 진출한 것은 비치니가 여전히 이탈리아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분명 그가 키워낸 황금세대가 훌륭한 성과를 이뤄낼 수 있으리라고 여겨졌다. 만치니가 더 많은 걸 해줄 거라는 기대가 만연했다.

 

유로 88은 만치니가 이탈리아의 주전으로 활약한 첫 메이저 대회였다. 그땐 몰랐겠지만, 그 대회는 23살이었던 그가 아주리의 메인 스트라이커로 뛴 마지막 메이저 대회이기도 했다. 90월드컵에도 소집된 만치니는 벤치를 달구며 경기를 지켜봐야 했다. 그는 떠오르는 스타 토토 스킬라치와 로베르토 바죠를 넘어서지 못했고 notti magiche(역주-마법 같은 밤이라는 뜻을 가짐. 이탈리아가 개최국이었던 90월드컵에서 4강에 진출하자 팬들이 다 함께 불렀던 노래)의 주인공은 그들이 되었다. 하지만 만치니의 실망감은 비알리에겐 비할 바가 안 됐다. 비알리는 부상에 시달리면서 폼을 잃었고 스킬라치의 자리를 다시는 되찾지 못했다. 만치니와 비알리 듀오는 삼프도리아에서 클럽의 유일한 리그 우승을 따내고 1992년에는 유로피안 컵 결승까지 진출하면서 거의 모든 걸 이뤄냈지만, 이탈리아에서는 그와 정반대였다. 코베르치아노(역주-이탈리아 대표팀의 훈련장이자 캠프)의 숙소는 그들에겐 원통한 호텔과도 같았다.

 

만치니는 모스크바에서 치러진 소련과의 경기에도 불려 갔다. 당시 아주리는 프랑코 바레시가 부상을 당했음에도 비치니가 이미 두 장의 교체 카드를 모두 소진해 10명으로 싸워야 했고 결국 0-0 무승부에 그쳤다. 이 경기 결과로 이탈리아는 스웨덴에서 열리는 1992 유로에 참가할 수 없었고 이 실패는 당시 인기가 많았던 비치니가 경질된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의 후임으로 온 아리고 사키는 오늘날의 펩 과르디올라와도 같은, 축구판 전체를 뒤집어 놓은 감독이었다. 그는 강한 압박 축구를 구사하면서 AC 밀란을 이끌고 2연속 유로피안 컵 우승을 차지하면서 리누스 미헬스의 아약스 이래로 축구계에 가장 큰 전술적 발전을 일궈냈다.

 

10년 뒤 미국에서 개최된 94월드컵의 자이언츠 스타디움 근처에는 스튜디오 54가 있었지만, 레이 호턴(역주-당시 아일랜드 선수)이 지안루카 파울리카(이탈리아 키퍼)가 나와 있는 것을 보고 살짝 띄워서 골망을 흔든 뒤 앞구르기 세레머니를 하고 잭 찰튼의 아일랜드 대표팀이 이탈리아를 무너트릴 때 만치니는 그 곳에 없었다. 그와 대표팀의 연은 사키가 3월 친선 독일 전에서 그를 풀타임으로 기용하겠다는 약속을 어겼을 때 끝나버렸다. 슈투트가르트에서 일하던 수백명의 이탈리아 팬들이 고틀리프 다임러 슈타디온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만치니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나폴리에서 디에고 마라도나의 10번 셔츠를 물려받은 왜소한 체격의 사르데냐 출신 공격수를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아왔던 것이다. “졸-라, 졸-라, 졸-라” 그들은 챈트를 불렀고 사키는 팬들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만치니는 하프타임에 교체되었고 밀란의 말펜사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열을 식히지 못했다. 화가 차오른 만치니는 수하물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사키를 쏘아붙였다.

 

“당신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요.” 그는 말했다. “다시는 나를 부르지 마요. 내 대표팀 커리어는 이제 끝난 겁니다.” 사키의 수석코치였던 카를로 안첼로티는 다이애나 로스의 시축으로 미국 월드컵이 개막하기까지 6주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아직 29살인 만치니가 벌써 대표팀 은퇴를 말하자 머리를 싸맸다. 만치니는 나중에 그 선택이 ‘아주 큰 실수’였다고 말했다. “선수들의 부상과 카드 징계, 그리고 당시의 열기를 생각해보면 나는 대회에서 많은 출전 시간을 받았을 거예요.” 그는 말했다. 그리고 누가 아는가? 사키는 결승에서 핏이 반 밖에 준비되지 않은 바죠 대신 그를 기용했을지도 모른다.

 

(Photo: Alessandro Sabattini/Getty Images)

 

그러나 세리에 A에서 가장 재능 있는 선수들 중 하나였던 만치니의 자존심에는 스크래치가 났다. 그는 그 날 부로 세리에에서 156득점을 올리고 비알리나 엔리코 키에사, 이후에는 리그 타이틀을 들어올린 라치오에서 ‘투우사’ 마르셀로 살라스의 수많은 득점을 도왔던 선수 치고는 너무나도 초라한 36경기 4골이라는 커리어를 남기고 대표팀을 은퇴했다. 시간은 만치니를 치유해주지 않았고, 그는 아직도 그 순간을 후회한다. “터무니 없는 일이 벌어진 거죠.” 만치니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갔다. “물론 상당부분이 내 잘못에서 비롯된 거긴 하지만요.”

 

이탈리아를 감독하는 것은 그의 어긋났던 대표팀 경력을 나름대로 바로잡는 과정이다. “두번째 기회를 받은 겁니다.” 그는 설명했다. 그러나 그 두번째 기회가 오기까지는 숱한 난관이 있었다.

전 이탈리아 축구 협회장 카를로 타베키오가 2017년의 파멸을 불러온 원인이라고 지목하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실수를 저질렀던 그가 회장으로 당선되는 일은 절대로 없었어야 한다.

 

하지만 타베키오는 2014년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 협회장으로 등극할 수 있었고, 이탈리아를 2연속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수렁에서 구해내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는 이 나라 최고의 감독을 데려오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 생각했고, 달마티아 해변에서 보트 여행을 즐기면서 안식년을 보내려던 한 사람을 영입했다. 모든 사람이 최소한 10년 간은 그 감독이 대표팀을 맡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타베키오는 그를 데려왔다. 그 감독의 이름은 안토니오 콘테였다. 콘테의 명성에 걸맞은 연봉을 끌어오는 수완과 그가 이탈리아 감독직을 수락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한 타베키오는 회장으로서 지지층을 확보할 수 있었다.

 

콘테는 애국심과 국가에 대한 의무감을 가지고 빠르게 오퍼를 수락했다. 그가 이탈리아의 감독을 맡은 또다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탈리아는 유로 2012와 U-21 유로 2013에서 결승까지 진출했지만 – 두 번 다 스페인에 패했다 – 앞으로의 전망은 어두웠다. 2006 월드컵 위너는 쇠퇴기를 걷고 있었고, 마리오 발로텔리와 안토니오 카사노는 그 골짜기 세대의 상징이었다. 대표팀의 관계자들 역시 새로운 재능의 부재에 대한 걱정을 털어 놓았다. 콘테가 지휘한 유로 2016의 이탈리아 대표팀은 비극적인 수페르가 비행기 참사로 그랑데 토리노(역주-40년대 이탈리아를 호령했던 위대한 토리노 세대를 말함)의 선수들 대부분이 사망해 대회가 열리는 브라질까지 배를 타고 이동했던 1950 월드컵 이후 가장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선수들의 기량 부족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탈리아는 2016년 프랑스에서 최고의 감독을 보유하고 있었고, 콘테의 능력은 다른 대표팀 감독들을 압도적으로 능가했다. 벨기에와 스페인 전 승리가 이를 방증하고, 우승도 불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8강 승부차기에서 그라치아노 펠레와 시모네 자자의 실축만 아니었다면 실제로 이탈리아가 트로피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콘테는 대회 이후 첼시의 사령탑으로 부임하기로 이미 합의를 마친 상태였고, 짧았던 대표팀 감독 커리어를 여름에만 잠깐 타고 나머지 시간은 차고에서 먼지만 쌓인 채 기다리는 스포츠카에 비유하면서 떠났다.

 

타베키오는 콘테의 후임까지도 그처럼 호전적이고 클럽 축구에서 야망을 지닌 사람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때문에 그는 예순 여덟의 기력을 잃은 몽상가 지안 피에로 벤투라를 선임했다. 벤투라는 이탈리아 감독직을 맡는 것을 평생의 업적으로 여길 만한 감독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는 무리하지 않고 팀을 이끌어가는 스타일로 여겨졌다. 벤투라는 바리에서 콘테의 후임으로 부임해 그와 비슷한 전술을 유지하면서 팀을 이끌었다. 토리노를 맡았을 때에는 그라나타(역주-토리노의 별명)의 20년 만의 첫 유럽 대항전 진출을 이끌면서 데르비 델라 몰레(역주-토리노와 유벤투스의 토리노 더비)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게 했고, 치로 임모빌레의 카포칸노니에레(세리에A의 득점왕) 수상을 도왔다.

 

초기에는 상황이 나쁘지 않게 돌아갔고 이탈리아 축협은 벤투라가 부임한지 1년 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섣불리 그의 계약 기간을 2020년까지 연장했다. 이는 이탈리아가 베르나베우에서 스페인을 꺾고 월드컵 진출권을 따낼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보여주는 쇼였다. 벤투라는 스페인에 악어들이 풀려 있는 것도 아니고 두려워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담대하게 스페인을 상대했고 저돌적인 4-2-4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콘테의 지휘 하에 파리에서 스페인을 상대로 압승을 거뒀던 이탈리아는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무너지면서 3-0 대패를 당했다. 벤투라는 경기에서만 진 게 아니었다. 그는 하룻밤새 선수들을 잃었고, 언론과 민심을 잃었다. “경기가 끝나고 유례없는 강한 비난이 시작됐어요. 전에는 본 적 없는 계획적인 폭격이었죠.” 그는 말했다.

 

스페인의 3-0 승리에서 득점하는 이스코. (Photo: David Ramos/Getty Images)

 

대표팀의 압박과 긴장감이 매우 높게 치솟았다. 타베키오는 언론 앞에서 벤투라를 도와주는 일이 거의 없었다. “월드컵에 나가지 못할 거라는 전망은 종말론과 다름없어요.” 선수들이 2017년 9월 레지오 에밀리아에서 다음 경기였던 이스라엘 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홈 팬들은 야유를 퍼붓고 휘파람을 불었다. 이탈리아는 임모빌레의 득점으로 1-0 승리를 거뒀지만 분위기를 반전시키진 못했다. 이제 대표팀은 벤투라의 능력 밖으로 떠났다. 그는 대표팀을 맡은 감독에게 가해지는 끊임없는 추궁과 비판에 노출된 적도, 이처럼 큰 경기를 지도해본 적도 없었다. 심지어 벤투라는 내부에서 그에게 악감정을 품은 사람이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때 그는 우리를 자원이 아닌 짐덩어리나 걱정거리로 바라봤어요.” 조르지오 키엘리니는 회상했다. “우리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그를 도우려고 했습니다. 그냥 그럴 가치가 없다는 것을 빠르게 깨닫고 축협에 찾아가서 공개적으로 새 감독 선임을 요구하는 편이 나았을 거예요. 언젠가 드레싱룸에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얘들아, 지금 우리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라고 의문을 갖기도 했었죠. 우리는 그냥 그 상황을 흘려보냈고, 결국 올 게 온 겁니다.”

 

다니엘레 데 로시의 자책골과 마테오 다르미안의 골대 불운이 겹치면서 이탈리아가 즐라탄 없는 스웨덴을 상대한 월드컵 플레이오프 첫 경기에서 패배했다. 진짜 종말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흘 뒤 산 시로에서 스웨덴과 2차전을 치른 이탈리아 대표팀은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그들은 골을 넣을 수 없었고 벤투라의 코치 중 하나가 데 로시에게 교체 투입 준비를 하라는 말을 하자 데 로시가 “What the fuck”이라고 분노해서 말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다. 그는 벤투라가 자신보다 나폴리의 기술적인 플레이메이커 로렌조 인시녜를 먼저 투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겨야 해. 비기면 안 된다고.”

 

그러나 이탈리아는 비겼고, 1958년 이후 처음으로 그들은 월드컵에 출전할 수 없었다.

 

울부짖는 부폰 (Photo: Robbie Jay Barratt – AMA/Getty Images)

 

“근 50년 만에 불어닥친 이탈리아 축구 최악의 위기였다는 건 확실했죠.” 키엘리니는 말했다. 시간이 지나고 난 뒤 그는 축구협회가 더 빨리 개입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던지기도 했다. “우리와는 달리, 크로아티아는 아주 중요한 플레이오프 경기 전에 감독을 바꿨고 월드컵에 진출했어요.” 키엘리니는 말했다. “심지어 그들은 모스크바에서 결승까지 진출했죠. 우리의 경우, 감독에 대해서 선수들과 대화가 이뤄진 적도 없었고 우리의 입장을 듣지도 않았어요.”

 

낯짝이 두꺼운 벤투라는 스웨덴 참사 직후에 사임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이 행동이 자신의 명성에 더 해가 갈 것이라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협회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어요. 모든 게 벤투라의 잘못이었죠.” 키엘리니는 불평했다. “벤투라가 골대를 맞추고, 벤투라가 찬스를 놓치고, 벤투라가 이탈리아의 월드컵 진출 실패를 만든 겁니다. 스페인 경기 전까지 나는 마치 대표팀 감독 같은 역할을 해야 했고, 그 후엔 샌드백으로 전락했어요.”

 

벤투라의 다음 행선지는 그를 콘테의 후임으로 부임시키는 최악의 선택을 하는 데 일조한 간부 중 하나였던 라치오의 회장 클라우디오 로티토가 운영하는 2부리그의 살레르티나였다. 벤투라는 그 곳에서도 오래 가지 못했다. 그는 1부리그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확보하지 못한 지난 8월 사임을 표명했다. 살레르티나는 그를 보내고 올 시즌 승격에 성공하며 1999년 이후 처음으로 세리에 A의 맛을 보게 됐다.

 

일단 그 산 시로의 끔찍한 밤으로 되돌아가보자. 다음날 아침 라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는 이 참사의 슬픔을 모두 보여주는 심플한 1면을 냈다. “La Fine.” 끝. 그 날은 부폰, 안드레아 바르찰리, 데 로시의 끝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2006 월드컵 우승 멤버였던 세 선수는 눈물을 흘리면서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어둠이 가시고, 새 아침은 그리 머지 않은 곳에 있었다. 가제타는 틀렸다. 이건 끝이 아니었다. 이건 l’inizio였다. 새로운 시작 말이다. 

바사노 델 그라파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난 뒤 홀짝홀짝 마시길 좋아하는 digestivo(역주-이탈리아에서 밥을 먹은 후에 마시는 식후주)증류업으로 유명한 도시이다. 또한 바사노 델 그라파는 협회의 기술 코디네이터이자 청소년 대표팀 코디네이터 마우리치오 비시디가 10년 가까이 살고 있는, 이탈리아 축구의 리소르지멘토(역주-부활, 부흥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이탈리아의 통일을 리소르지멘토라고 부른다)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코베르치아노(역주-이탈리아 대표팀의 훈련장, 캠프)에서 수석 분석가를 맡고 있는 안토니오 갈리아르디의 고향도 바로 그곳이다. 또한 이탈리아 옵타의 선구자 격이라고 할 수 있는 SICs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SICs를 통해서 많은 경기 분석가들과 데이터 과학자들이 축구계에 발을 들였다.

 

특히 비시디는 이탈리아 축구계가 문화적으로 큰 발전을 이루는 데에 일조했다. “우리는 (2018년에) 러시아에 가지 못했죠.” 그는 말했다. “그리고 그때는 이탈리아 축구의 사망이 선고된 것만 같았어요.” 그러나 비시디는 이탈리아가 살아날 징조를 보았다. 그는 2010년 현역 시절 밀란의 레전드 미드필더였던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의 부탁을 받아 FIGC(이탈리아 축구 협회)에 합류했다. 알베르티니는 시스템을 개편하고 더 좋은 코칭 방법을 통해 새로운 재능들을 발굴하기 위해 은사 아리고 사키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비시디는 80년대 말 칼쵸 파도바에서 계약직 코치로 일할 때 사키가 밀란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그의 영웅의 훈련과 전술을 모방하는 데 열중했을 정도로 사키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그러니 사키가 이끌던 밀란의 U-19팀에 취임한 비시디와 선수로 뛰던 알베르티니는 서로 마음이 잘 맞을 수밖에 없었다 – 그리고 알베르티니는 비시디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사키는 경기들을 돌려본 뒤 의견을 전달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새로운 세대는 일정 이상의 기량을 지니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그가 내놓은 솔루션은 꽤나 간단했다. 사키는 더 뛰어난 국가들을 상대하는 경기 일정을 늘렸고, U-15팀을 새로 편성했다(역주-사키가 팀을 만든 2011-12 시즌 전까지는 15세 이하 선수들을 위한 국가대표팀이 따로 없었다). 또한 유스 리그를 세분화 함으로써 세리에 A와 B의 프로 팀들이 C와 D의 아마추어들을 상대하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게 했고, 감독들을 불러 그가 다음 세대의 선수들에게 원했던 원칙들에 관해 교육하기 시작했다. 결과도 비교적 빨리 나왔다. 2013년 U-17 대표팀은 유로 결승까지 진출했고, 마르코 베라티, 인시녜, 임모빌레의 U-21팀 역시 동일한 성과를 냈다. 사키는 기반이 다져졌다고 확신하고 비시디에게 자신의 역할을 맡긴 뒤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청소년 감독직은 그리 안정적인 지위를 확보하지 못했다.

 

U-21 유로 2013 결승에서 스페인에 패한 이탈리아 21세 이하 대표팀. 임모빌레, 인시녜, 베라티가 눈에 띈다. (Photo: VI Images via Getty Images)

 

이탈리아가 2014 월드컵에서도 조별리그 탈락에 그치자, FIGC의 회장 지안카를로 아베테와 감독 체사레 프란델리는 TV 라이브 방송에서 사퇴를 선언했다. 문제는 새로운 지도부가 판을 아예 뒤엎고 처음부터 시작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콘테가 코미사리오 테크니코, 즉 이탈리아의 감독이 되었을 때, 그에겐 테크니컬 디렉터로서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이 주어졌고 모든 연령별 대표팀을 감독할 수 있었다. 그는 스스로 청소년 대표팀을 지휘하면서 일을 처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콘테는 그의 원래 직책이었던 퍼스트팀 감독 역할을 하는 데 집중했고, 사키가 시작한 일은 FIGC의 퍼포먼스, 스카우팅, 경기 분석 코디네이터도 겸직하던 비시디에게 맡겼다.

 

비시디는 이탈리아의 DNA가 빗장수비와 한 순간의 역습을 통한 승리로 축약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점에 한해서는 반문화적인 성향을 띠는 지도자이다. “그건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주입식 교육을 시키는 것과 같아요.” 그는 기존의 카테나치오를 향한 도전을 했던 사키의 이론을 되새겼다. 비시디는 많은 신예 감독들이 선수를 키워내기보다는 자신의 이름을 날리는 것을 우선시했던 이탈리아의 감독 숭배 문화 때문에 너무 오랫동안 선수들을 발전시켜 재능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전술 연구가 우선시되었다고 믿는다. 사람만 한 크기의 체스판이 관광 명소로 유명하기도 한 바사노 델 그라파의 비시디는 선수들을 감독의 위대한 계획에 쓰이는 퍼즐들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선수들이 자신에 대해 더 생각해보길 바라고, 이제 모든 이탈리아 대표팀들은 C-A-R-P라는 네 개의 핵심 원칙을 따른다. C-A-R-P는 Costruzione (빌드업), Ampiezza (폭), Rifinitura (상대 라인 사이와 파이널 써드에서의 공격 작업), Profondita (뒷공간)을 의미한다.

 

“이 원칙들이 어떤 포메이션을 가동하든 꼭 지켜야 하는 철칙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갈리아르디(아까 나온 코베르치아노의 수석 분석가)는 말했다. “모든 팀들은 후방에서 빌드업을 하는 선수, 경기장 측면에서 공격의 폭을 제공하는 선수, 라인 사이를 활용할 수 있는 선수와 그 뒷공간에 들어가는 선수를 보유해야 합니다. 만약 네 조건을 모두 충족한다면 그 팀은 경기를 지배하고 공격할 수 있을 거예요. 한 팀에서 선수들의 역할을 포지션으로 분류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이제는 그 선수의 역할을 봐야 해요. 이건 내가 몇 년 전부터 말해왔던 겁니다. 현대 축구, 특히 유럽 축구에서 선수들은 더 이상 한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아요. 풀백이라고 측면 수비만 하면 되는 게 아닙니다. 팀에서 본인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 알아야죠. 우리는 리버풀의 트렌트 알렉산더-아놀드 같은, 풀백인데도 진짜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하는 선수들을 보고 있어요. 우리는 10번 롤을 맡는 윙어들도 보고 있습니다. 이제는 포지션에 따라서 선수를 정의하면 안 돼요. 그들이 하는 게 뭔지를 봐야 합니다.”

 

불안정한 이탈리아 축구계에서, 이탈리아 스포츠 최고 행정 기구인 이탈리아 올림픽 위원회가 대표팀의 2018 월드컵 진출 실패를 문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했을 때 이 모든 플랜이 엎어지고 다시 쓰레기통에 처박힐 수도 있었다. 위원회는 FIGC의 본사와 지부를 심사하기 위해 두 명의 고위 위원을 선발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밀란의 센터백이었던 빌리 코스타쿠르타였다. FIGC가 하던 모든 프로젝트가 잘못됐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일은 간단히 끝났을 것이다. 정치인과 팬들은 직원들의 모가지를 치는 결말을 원했다. 그러나 코스타쿠르타는 콘테가 본 것을 봤다. 그 비극의 이면에는 비시디와 그의 팀이 있었다. 그들은 이탈리아를 올바른 길로 이끌고 있었다. “정부가 네 번 바뀌었지만, 클럽 이탈리아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런 꾸준함은 우리의 발전의 핵심이죠.” 비시디는 말했다. “운 좋게도 우리는 2016년부터 2020년까지 네 개의 은메달을 땄어요. 우리는 U-19 유로와 U-17 유로 결승에 진출했어요. U-17은 두 대회 연속이었죠. 8년 간 출전하지 못하고 최고 성적이 8강이었던 U-20 월드컵도 3위로 마감했어요. 우리의 랭킹은 17위에서 4위까지 수직 상승했습니다.”

 

그런 비시디의 시스템을 포용하고 그를 토대로 삼은 사람이 바로 벤투라의 근사한 후임, 만치니였다.

역주: 유로 시작 전, 6월 초에 나온 기사입니다. 현재 상황을 묘사하는 내용에서는 지금과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스웨덴 전 플레이오프를 다시 돌려보는 건 괴로운 일이었지만, 코스타쿠르타는 만치니가 그리 하도록 했다. 그는 이 참사에 대한 만치니의 의견을 듣고 싶어 했다. “안드레아 벨로티와 임모빌레는 경기 내내 수비 진영에만 머물러야 했어요. 스웨덴이 그런 상황을 유도한 거죠.” 코스타쿠르타는 말했다. “그래서 나는 로베르토에게 ‘봐. 나는 상대 진영에서 그들을 몰아붙이는 팀을 보고 싶다고.’라고 말했죠.” 만치니는 되받았다. “그렇다면 적임자를 잘 찾아온 거네.”

 

그런데 과연 만치니가 저런 유형에 알맞은 감독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강한 압박을 가져가고 압도적인 점유율 축구를 하는 감독들을 생각해보면 그가 첫손에 꼽힐 만한 인물은 아니다. 적어도 당신은 그럴 줄 몰랐겠지만, 지난 3년 간 이탈리아가 보여줬던 – 티키-이탈리아라고 할 만한 – 경기력과 전술은 놀랍도록 즐거웠다. 몇몇 사람들은 이런 축구가 올드스쿨한 이탈리아 감독들보다 부야딘 보슈코프, 스벤-고란 에릭손 같은 아웃사이더들의 지도를 주로 받은 만치니의 선수 시절 경험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다른 이들은 그가 해외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는 점에 주목한다. 맨체스터 시티부터, 갈라타사라이와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그가 맡았던 팀들, 특히 인테르와 시티에는 아주 기술적인 선수들이 많았고 팬들을 즐겁게 해줄 수 있었지만, 그들은 현재 만치니의 이탈리아만큼 변화무쌍하고 유동적인 축구를 하진 않았다. 이탈리아에서 만치니가 이뤄낸 업적은 그의 이상과 딱 맞는다. 만치니는 이탈리아에서 재도약하고 커리어를 다시 일궈낼 수 있었다.

 

대표팀이 그를 필요로 했던 만큼, 그도 대표팀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맨시티에서 경질된 이후 만치니의 커리어는 묘하게 흘러갔고, 이제야 그가 얼마나 대단한 감독인지를 계속해서 증명하고 있다. FIGC의 가브리엘레 그라비나 회장은 그를 눌러 앉히길 바랐고, 만치니는 2026년까지 가는 재계약을 맺었다. 그는 다시 한번 빅클럽들과 링크되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2017년 벤투라의 결국은 실패로 끝난, 시기상조였던 계약 연장 때와는 달리 어느 누구도 만치니가 5년 더 아주리를 지휘하는 데에 의구심을 품지 않았다.

 

만치니와 비알리, 그리고 이탈리아 선수단 (Photo: Giorgio Perottino/Getty Images)

 

이탈리아는 3경기의 여유를 가진 채 유로 진출을 확정했고 10월에는 네이션스리그 결승 진출을 위해 네 경기를 치를 것이다. 그들의 피파 랭킹은 같은 A조 참가국인 웨일스보다 뒤쳐졌던 21위에서 7위까지 올라갔고, 27경기 연속 무패행진을 이어 나가면서 (역주-벨기에와 8강전에서도 이긴 현재는 32경기 무패행진으로 늘어났다) 두 번의 월드컵을 연달아 우승한 비토리오 뽀쪼의 기록을 깼다. 지금의 이탈리아 대표팀에는 벤투라 휘하에서는 볼 수 없던 여유가 넘쳐 흐르고, 만치니의 아우라는 코베르치아노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그는 어떻게 슈퍼스타들을 다루고 더 나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알고 있다.

 

만치니는 베라티, 인시녜, 조르지뉴 같은 퀄리티 있는 선수들을 기반으로 팀을 만들어왔다. 세 선수 모두 벤투라가 기용할 수 있는 자원들이었지만 모두 제 포지션과 다른 위치에서 뛰거나 출전 시간이 부족했다. 저 셋 중 두 명은 PSG와 첼시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을 경험했고, 이십대의 막바지에 다다른 그들은 국제 무대에서 완전히 무르익은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만치니의 프로젝트에서 베라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해보면 그의 무릎 상태는 걱정거리이긴 하지만, U-15팀부터 성인팀까지 같은 철학으로 뭉쳐진 현재의 이탈리아는 만치니를 포함한 파릇파릇한 재능들이 대거 참가했던 유로 88 때의 이탈리아를 닮았다. 비시디는 만치니의 프로젝트가 성공하는 데 기폭제 역할을 했다. 다른 한 편으로, 만치니는 그 자신의 경험을 잊지 않으면서 어린 선수들을 굉장히 빠르게 기용해보는 등의 선수단 운영을 했다. 그는 세리에 A 데뷔전을 치를 때 고작 17살이었다. 또한 U-19나 U-21 팀에서 승격한 선수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전술에 적응할 필요가 없어졌기에 세대 교체도 이론상으로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치니는 세리에 A 감독들에게 이제는 자국의 유망주들을 신뢰할 때라는 메시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니콜로 자니올로가 로마에서 단 1분도 뛰지 못했을 때 대표팀에 콜업했다. 이런 과감한 기용은 만치니 체제 이탈리아의 분위기를 만들었고, 이후 자니올로는 베르나베우에서 챔피언스리그 데뷔전을 치를 수 있었다. 21살 밖에 안 된 미드필더가 양 무릎을 모두 다치고 유로를 놓친 건 안타까운 사고였을 뿐이다. 이후 35명의 선수가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고, 만치니는 이탈리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면서 선수들에게 자신도 국가의 부름을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줬다. 그가 오기 전까지 이탈리아는 21세기 들어서 한 경기에 6골 이상을 넣은 적이 없었다. 이제 그들은 그런 대승을 네 번이나 거뒀고, 아르메니아 전 9-1 승리는 1948년 이래로 가장 큰 승리였다.

 

팀은 경기장 안팎에서 항상 함께 한다. 만치니의 형제와도 같은 코칭 스태프 비알리, 알베리고 에바니, 아틸리오 롬바르도, 파우스토 살사노는 삼프도리아의 스쿠데토 위업 이후 30년 만에 뭉쳤고, 아마 그들은 웸블리에서 우승컵을 눈 앞에서 놓쳤던 1992년의 망령을 때려눕히길 바라고 있을 것이다. 그때 삼프도리아는 유로피안 컵 결승에서 요한 크루이프의 바르셀로나를 만났고, 그들을 넘어서지 못했다. 특히 이탈리아의 단장을 맡고 있는 비알리는 췌장암을 완치한지 17개월 정도가 지난 지금 그의 주변인들에게 자신이 아직도 건재함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만치니는 치료의 부작용을 숨기기 위해 눈을 찡그리고 셔츠 아래에 몇 겹의 옷을 더 입어야 하는 것에 대해 말한 그의 친구를 위해 기도했다.

 

“절대로 싸움이라 생각해본 적 없어요.” 비알리는 말했다. “나는 언제나 암을 피해가면 좋을 여행의 동반자라고 생각했죠. 나는 내 동반자가 지쳐 내 곁에서 떠나 가도록 하려 했죠.” 비알리는 그 여행에서 건강하게 돌아올 수 있었고, 대표팀에도 성공적으로 복귀했다. 그가 돌아오던 날 루시오 바티스티의 칸조네 델 솔레를 부르고, 축구공을 집어 들어 키스를 한 뒤 피렌체에서의 경기를 위해 다시 사이드라인에 던져주는 광경을 보니 마음이 절로 훈훈해졌다. “승리는 중요하지 않아요.” 비알리는 말했다. “승자처럼 생각하는 게 중요한 거죠. 인생의 10%는 당신에게 일어나는 일이고, 나머지 90%는 당신이 그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로 구성되는 겁니다. 나의 이야기를 듣고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라요.” 비알리는 여러 방면으로 선수단에서 긍정의 아이콘 역할을 하고 있다. 대표팀 캠프에 스며든 긍정적인 마인드는 4강 진출도 현실적으로 느껴지게 하는 힘의 원천이다(역주-실제로 7월 3일 4강 진출에 성공했다…).

 

만치니는 조용히 이 말에 X표시를 보낼 것이다. 그는 그 이상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언제나 그의 영역 밖에 있었다. 만치니는 삼프도리아라는 작은 클럽을 챔피언으로 만들었고, 라치오가 70년대 이후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그는 18년 간 스쿠데토에 목 말랐던 인테르와 훨씬 오랫동안 기다렸던 시티의 우승을 이끌었다. 그가 이루지 못한 건 대표팀 뿐이었다. “우리가 (선수 시절) 이탈리아 대표팀에 갔을 때, 베페 베르고미나 프랑코 바레시 같은 월드컵을 우승한 윗세대 선수들을 볼 수 있었어요.” 최근 만치니는 과거를 회고하며 말했다. “얼마 뒤에는 파올로 말디니와 바죠도 보였죠. 우리는 1982년이나 2006년 세대처럼 시상대 꼭대기에 서지 못했어요. 항상 2, 3등만 했죠.”

 

만치니의 이탈리아 선수단이 그 시절 같은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만한 선수들을 모아 놓은 팀에 비해서는 떨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두번째 기회를 받았고,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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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링크: James Horncastle 2021.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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