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 울브스 챈트-Nuno had a dream/Hi Ho Wolverhampton [FASTory] 제목은 이 챈트를 패러디한 것입니다.
아이덴티티, 즉 정체성은 오늘날의 축구계에서 과도하게 많이 쓰이는 단어이다. 말하긴 쉽지만… 알아채기는 어렵다. 그리고 한 팀에 확실한 정체성을 잡아주는 것은 훨씬, 훨씬 더 어렵다.
최근 몇 년 동안 울버햄튼 원더러스는 명확한 정체성을 지닌 팀들 중 하나였다. 울브스는 단지 익숙한 3백으로만 대표되는 팀이 아니었다. 수비 시엔 팀 전체가 콤팩트한 간격을 유지하다가 기회가 한 번 생기면 앞으로 튀어나가면서 역습을 개시한다. 그들의 감독 누누 에스피리투 산투는 울브스의 역습을 ‘최대한 넓은 폭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표현하길 좋아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누가 팀에 심어 놓은 공통적인 태도였다. 그가 부임한 이후 처음으로 치른 공식 경기였던 2017년 8월 챔피언십 미들즈브러 전 (1-0 승리) 부터, 누누는 “우리가 원하는 마음가짐과 스피릿이 있습니다 – 항상 볼을 향해 달려드는 거죠”라고 말했다. 울브스의 팬들은 이런 정체성을 인정하고 사랑하기 시작했다. 울브스는 푸싱 인터내셔널과 조르제 멘데스 덕에 다른 2부리그 팀들보다 높은 퀄리티의 선수들을 영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수들 개개인의 재능 뒤에 팀의 확연한 정체성과 스피릿이 있었기에, 울브스는 압도적으로 우승을 차지한 뒤 1부 리그로 승격하고, 프리미어리그에서 두 시즌 연속으로 7위에 오르고, FA 컵 4강과 유로파리그 8강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지난해 8월 뒤스부르크에서 유로파리그 8강 세비야 전을 치르기 전 날, 누누는 그의 팀이 얼마나 긴 여정을 걸어왔는지 말했다. “우리는 우리만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었어요.” 누누는 말했다. “정체성을 갖는다는 건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입니다. 정해진 전술 하에서 경기를 뛰고 여러 문제들에 대처하는 거죠. 아이덴티티는 그 모든 것들을 포함하는 말이에요. 나는 우리가 이뤄온 것들이 너무나도 자랑스럽습니다. 이제 나는 우리가 울브스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누누의 진심이 실렸던 그 말들은 올 시즌 울브스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전술적으로 정체성이 분명했던 팀은 엉망이 되었다. 지난 세 시즌 동안 퀄리티 높았던 그들의 수비는 – 그들의 대형과 조직력, 서로를 위해 싸워주는 투쟁심, 실점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 하는 자세까지 – 사라져버렸다. 일요일 4-0 완패로 끝난 번리 홈 경기처럼 더 나쁜 경기가 나올 수도 있었다. 윌리 볼리의 판단 미스에서 기인한 첫 실점부터 로망 사이스의 안일한 패스가 불러온 마지막 실점까지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개인기량이나 집단적인 책임감이 결여돼 있는 퍼포먼스의 연속이었다. 금요일 밤의 호러쇼로 불리는 9월 웨스트햄 전 같은 졸전들이 올 시즌에 몇 번 있긴 했으나, 이 정도로 안 좋은 경기는 없었다. 누누는 그 패배가 단순히 잘못된 결정들 때문이었고 ‘애티튜드에 관해서는 할 말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어떻게 그리고 왜 판단 실책에 의한 대가가 이렇게까지 뼈아픈 것인가?
물론 참작할 만한 요인들도 있다. 절대 예견하거나 피할 수 없는 사고들과 (11월 두개골 부상을 입은 라울 히메네스는 득점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해주는 스트라이커였다) 쉽게 잊혀질 수 있는 방해 요인들 (울브스는 지난 8월 유로파리그 8강 이후 프리시즌 트레이닝 시작까지 3주 밖에 휴식을 갖지 못했다) 부터 보다 근본적인 문제 (축구가 무관중 경기로 치러지기 시작한 이후 리버풀, 셰필드 유나이티드, 울브스가 다 함께 무너진 게 과연 우연의 일치일 뿐일까? 세 팀 모두 지난해 락다운 전 팬들과 함께하면서 큰 상승세를 탔었다)까지.
그걸 넘어서, 누누는 포르투갈에 거주 중인 그의 가족의 ‘사랑’으로부터 오랜 기간 동안 멀리 떨어져 있는 삶의 어려움을 꾸준히 말해 왔다. 이런 상황은 모든 이들을 괴롭게 하지만, 사람들을 상대하는 직업을 지닌 이들에겐 더욱 힘들 수밖에 없다. 그는 매치 데이의 분위기를 그리워한다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대다수의 감독들보다 훨씬 많이 했었다. “우리는 경기를 끝내고 팬들에게 다가가 진짜 관중들의 기분을 느낄 수가 없어요.” 최근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분위기를 다 잃어버린 거죠. 팬들이 없으면 축구는 절대로 원래의 치열함을 유지할 수 없어요.”
울브스의 서포터들은 다음 시즌에 누누가 생기를 되찾고 그의 팀과 함께 새 출발을 하길 바랄 것이다(역주-현지 팬들 말하는 듯합니다… 뭐 그렇겠죠). 몰리뉴에 다시 사람들이 들어차고 라울이 공격진을 이끄는 걸 보고 싶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지난 13개월 동안 울브스가 뭔가 잃어버린 건 아닌지 두려움을 가진 것을 용서받을 테다.
“누누에겐 꿈이 있었지”라는 챈트가 있다. 그러나 그가 부임한 후 네 시즌이 다 되어가는 상황에서, 누누의 비전은 흐릿해지기만 하고 있다.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울브스의 정체성도 희미해져 가고 있다.
누누의 의도는 올 시즌에 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이었다. 두 시즌 연속 7위 달성은 새로 승격된 팀의 성과로는 굉장히 인상적이었으나, 누누는 동시에 시스템적인 한계도 느꼈다.
그들의 수비적인 기록은 매우 뛰어났지만, 2018-19 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울브스의 47골보다 적은 득점을 기록한 팀은 7팀 뿐이었다. 울브스 위의 상위 6팀은 최소한 63골씩을 넣었다. 이후 시즌에는 51골을 득점해 약간의 증가세를 보였지만, 여전히 탑6와의 격차는 컸다. 저조한 결정력 때문에 비겼던 경기들에서 승점 3점을 챙기려면 울브스가 훨씬 더 많은 골을 넣어야 할 것은 분명했다. 다만 이미 재능이 출중한 선수단을 업그레이드하기 보다는 누누가 팀의 밸런스와 역동성에 변화를 주는 편이 나아 보였다.
올 시즌의 출발은 아주 좋았다. 리그 첫 7경기에서 4승 1무 2패를 기록했다. 그러나 그들의 호성적은 운에서 기인한 부분도 꽤 있었다. 10월 말에는 울브스가 경기력에 비해 좋은 승점을 거두고 있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해다. 11월 초 레스터 시티 원정의 아주 끔찍하고 지루한 1-0 패배는 그런 퍼포먼스를 그대로 보여줬다. 이 경기는 누누가 변화를 주는 시발점이 되었다.
누누는 바로 다음 경기였던 A매치 휴식기 이후 사우스햄튼 홈 경기에서 3백을 버리고 4-3-3을 가동했다. 넬송 세메두와 라얀 아이트-누리는 풀백 포지션에서 왕성하게 공격에 가담했다. 울브스는 2019년 1월 이후 리그 경기에서 가장 많은 유효 슈팅 (9개)을 때렸고 올 시즌 최고 xG(1.9)를 찍었다. 말 그대로 그들은 높은 퀄리티의 골 찬스들을 더 많이 만들어냈다. 수비적인 단단함은 좀 사라지긴 했으나, 1-1 무승부 이후 누누는 변화와 공격하는 방식에 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6일 뒤 아스날 전 승리는 새로운 시스템에 대한 그의 믿음을 공고히 했다.
이후 다섯 달 간 울브스는 퍼포먼스, 결과, 개인 기량, 시스템 등 모든 것들에서 아주 큰 기복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프리미어리그 스물 세 경기에서 11패를 거뒀다. 누누는 11패 중 6경기를 치른 이후 다음 경기에서 포메이션에 변화를 가져갔다.
오랜 기간 동안 검증된 3백 시스템이 재미없고 골이 안 터지는 경기를 만드는 반면 4백은 양 팀 모두에서 다득점이 터지게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1월의 브라이튼 전 3-3 무승부와 웨스트 브로미치 알비온 전 3-2 패배는 그런 이분법적인 사고를 더욱 부추겼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두 시스템 간의 차이도 미미해졌다. 믿음직한 3백을 가동한 울브스가 일요일 번리를 상대로 그렇게 맥없이 무너지는 것을 그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여기엔 너무나도 많은 요인들이 있다. 이전에 매크로처럼 언급된 이슈들 뿐만 아니라 맷 도허티와 디오고 조타의 이적, 그리고 그들을 대체하는 데에 겪은 어려움 역시 이유로 꼽힐 수 있다. 도허티와 불운한 조니 카스트로(역주-조니가 최근 다시 한번 십자인대 부상을 당했기에 ‘불운한’이라는 워딩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는 윙백 포지션에서 언제 올라가고 언제 자리를 지켜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메두와 아이트-누리는 더 이상 이전의 탄탄함과 안정적임이 존재하지 않는 시스템에 적응해야 했다. 라울의 이탈 역시 아주 뼈아팠다. 그의 개인 기량이나 골 결정력 뿐만 아니라 그가 팀에게 해줬던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윌리안 주제와 파비우 실바는 그의 빈 자리를 전혀 메우지 못하고 있다.
이젠 모든 게 불확실해 보인다. 울브스의 성공을 뒷받침했던 팀 스피릿은 사라진 것 같다. 지난 몇 시즌 간 믿음직한 리더였던 코디마저도 이전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서로 다른 수비적 시스템에 적응하는 어려움 (4백에서는 눈에 띌 정도로 힘들어 보였다), 팀 전체를 관통하는 자신감의 부재, 신체적인 피로, 정신적인 피로, 팬데믹 시대 축구의 무료함, 혹은 이 모든 요인들 때문이라고 해도, 그건 확실히 큰 문제이다.
올 시즌 울브스에게도 리버풀과 셰필드 유나이티드 서포터들이 물었던 것과 비슷한 질문이 던져진다. 피치 위에서 강력한 열정과 확실한 정체성을 지녔던 팀이 어떻게 이렇게 물렁하고 사기가 떨어지는 팀으로 변해버린 것인가? 모든 게 잘 맞아 보였던 과거가 이리도 갑작스럽게 틀어져버릴 수도 있는가? 지금 이 상황은 올 시즌이 끝날 때까지만 지속되고 다음 시즌에는 그 전의 울브스가 돌아오는 것인가, 아니면 이미 맛이 가버린 것인가? 그리고 만약 이미 팀의 방향이 완전히 어긋난 것이라면, 누누가 울브스에서 이뤄낸 과거의 업적은 그가 다시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제시하는가? 아니면 이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어떤 조치를 꺼내야 할 때인가?
누누는 여전히 서포터들에게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다 – 그리고 실제로 최근 몇 주 간 입장 표명에 신중을 기했던 구단주와 보드진 역시 올 시즌은 너무 힘들었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누누 감독은 내부 회의에서 다음 시즌 ‘다시 한번’ 궤도에 오를 필요가 있다고 강하게 이야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지난주 감독 자리가 공석인 토트넘과 링크됐을 때, 누누는 지난 9월 새로운 3년 재계약을 맺은 울브스에 대한 헌신을 이보다 더 분명히 밝힐 순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아직도 끈질기게 의심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이 팀을 다시 정돈하고 폼을 되찾을 누누에 대한 전망에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백지에서부터 새로운 그림을 그릴 최고의 타이밍이 있다면,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강등 당할 일도 없고, 지난 시즌의 까다로운 유럽 대항전도 없으며, 훈련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고 엄청난 신임을 받고 있는 데다가 (서포터, 선수들, 보드진 모두가 말이다) 관중석의 야유에서도 자유로우니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울브스는 과도기에 들어서지 않았고, 때문에 팀의 다음 스텝에는 약간 불편한 의문점이 남는다. 만약 그 다음 단계가 자유를 부여하며 보다 창의적인 플레이를 하는 것이라면, 과연 누누가 그걸 해낼 수 있는 감독일까?
수비적인 전술을 사용하다가 좀 더 공격적인 전략을 들고 나와 성공을 거둔 감독들은 그리 많지 않다. 조세 무리뉴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시절 2년차에 잠깐 그런 변화를 시도했고 초반 리그 7경기에서 21득점을 뽑아냈다. 그러나 그는 문제의 기미가 보이자마자 다시 버스를 세우던 시절로 회귀했다. 리버풀 감독 시절 제라르 울리에는 2002년 지병으로 인해 잠시 팀에서 이탈했다가 복귀한 뒤 선수들에게 ‘자유를 부여하고 더 화려한 스킬을 구사하길’ 바랐다. 그러나 곧 리버풀은 그들의 상징과도 같았던 단단한 수비를 잃어버렸다. 울리에는 변화를 번복하고 다시 수비적인 전술을 가동했지만, 리버풀은 뭔가 빠진 듯 했고 다시는 이전의 안정적인 수비를 되찾지 못했다.
중위권팀들을 보면 샘 앨러다이스 감독이 2013-14 시즌 웨스트햄에서 ‘더 큰 재미를 선사한다’면서 새로운 공격 코치 선임까지 요구했던 선례가 있다. 앨러다이스는 확실한 변화를 꾀했으나 수비적으로는 시스템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가 믿었던 전술의 골자는 그대로 유지했다. 웨스트햄은 그 다음 시즌에 네 골을 더 넣고 승점은 7점 더 땄지만, 프리미어리그 순위는 13위에서 12위로 올라가는 데 그쳤다. 앨러다이스는 2015년 5월 팀을 떠났다.
요는, 올 시즌의 누누가 하려 했던 것처럼 핸드브레이크를 푸는 건 엄청나게 어렵다는 것이다. 게다가 3/5백에서 4백으로 바꾼다는 시스템 변화가 멘탈에도 영향을 끼친다면 난이도는 훨씬 더 높아진다. 라울과 조니 (그리고 사실상 도허티와 조타까지) 가 있었다면 상황이 얼마나 달라졌을지 궁금해지는 한편, 누누는 올 시즌의 변화가 볼리, 코디, 사이스를 비롯한 모든 선수들의 혼란을 야기했다고 말할 수 있다.
누누는 지난 11월 스카이스포츠와의 인터뷰에 전술적인 시스템에 관해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선수들이 콤팩트한 간격을 유지하고 서로를 가까이하면서 어디에 공간이 있는지를 아는 거죠. 하지만 때가 되면 우리는 수비를 위해 대형을 갖출 거예요. 주요한 아이디어는 수비 시엔 간격을 최소화하고 공격 시엔 폭을 최대로 넓히는 겁니다.”
누누는 팀의 토대가 ‘상당히 잘 갖춰졌다’고 말했다. “선수들을 골라서 경기라는 퍼즐에 끼워 맞추는 것과 같아요. 그리고 이 체계는 우리가 선수들과 함께 보냈던 긴 시간들의 산물이죠 – 선수들이 우리가 말했던 걸 이뤄내면, 팀은 한 걸음을 나아가는 거예요. 그런 과정을 반복하는 겁니다. 우리만의 루틴이 만들어지고, 정체성이 생겨요.”
그가 딱히 다른 방향성을 제시하는 유형의 감독은 아닌 듯했다. 돌이켜 보면, 아마 그 11월 이래로 지나왔던 고된 다섯 개월 동안 누누는 그가 성공을 맛봤던 공식을 고수하면서 퍼포먼스를 되찾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전술 변화의 이면에는 분명 근거가 있었다. 울브스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전환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스템 변화는 여러 이유들로 인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이제는 이 팀의 모든 것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정체성의 문제이다. 아이덴티티란, 만들어가긴 매우 어렵지만 한 순간에 잃어버리긴 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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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링크: Oliver Kay 2021.04.29